1.

냉장고 속으로 사라진 하루

by 모티


시계 속 뻐꾸기가 텅 빈 집안을 울리며 저녁을 알렸다. 노을빛은 너른 하늘 위에 일렁이다 저물어갈 무렵 이내 아쉬운지 베란다 창을 넘어 들었다. 노랗게 물든 거실 곳곳을 누비다 소파 위에 곤히 잠든 해진의 볼에 한참을 앉았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해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기나긴 단잠에 빠지려는 찰나 이를 방해하는 요란한 뻐꾸기 소리에 해진은 잠에서 깼다. 적막한 기운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번쩍 떠 벽에 붙은 낡은 시계를 보니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진은 기지개를 켰고 이내 뻑적지근한 턱을 이리저리 돌리다 왼 볼을 만졌다. 축축한 기운은 물론이고 가죽 쿠션의 지퍼 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움푹 파여버린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쿠션 위에 아슬한 형태로 남겨진 침자국을 손목 안쪽으로 쓱 닦아내고선 몸을 일으켰다.


풍성한 오른쪽에 비해 완전히 짓눌린 왼쪽 머리. 눌린 머리를 부풀리려 머리칼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애매하게 살아난 볼륨에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옷매무새도 대충 가다듬었다. 오후 6시면 칼같이 퇴근하는 규진의 저녁상을 차려야 했기 때문이다. 삼시 세 끼를 꼬박 챙기는 집은 손에 꼽았지만, 정년을 한참 멀리 두고 빠르게 퇴직해 가정생활에 전념하겠다 선언한 해진이었기에 그 약속만은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직장 생활을 했더라면 몇 끼 식사쯤은 거뜬히 배달이나 밀키트 정도로 채울 수 있었겠지만 외벌이를 하는 규진을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해진은 자꾸만 뒤척이다 느지막이 잠에 드는 바람에 부쩍 피로감이 잦아졌다 생각했다. 찌뿌둥한 몸을 기어코 일으켜 거실로 나오니 너저분한 집안 꼴에 해진은 말을 잃었다. 30년 차 주부임은 확실했지만 살림살이에 뛰어든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 정도쯤이었기에 미숙한 것은 한참 많았다. 이를테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난 후에야, 잔반이 담긴 접시를 다시 싱크대에 넣는다던가, 아니면 TV 드라마가 끝나서야 세탁기를 돌리는 뭐 그런. 하지만 그런 어수룩함은 이 집에서만큼은 유일하게 허용되는 것이었다. 모양은 다르지만 제법 그럴싸한 형태로 갖춰가고는 있었고, 해진은 조용한 집 안에서 저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가는 것에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


보송하게 마른 수건을 거실로 한아름 가져와 바닥에 내팽겼다. 매사 노심초사하는 해진이 오롯이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소리 없는 폭력 같은 거였다. 널브러진 수건 더미를 보며 풉 웃어 보이곤 양반 다리로 앉았다. 자연스레 팔을 뻗어 리모컨을 집었고 익숙한 드라마 채널 번호를 눌렀다. 마침 요즘 인기 있다는 '나의 해방일지'가 방영되고 있었다. 무릎 위에 수건을 하나씩 얹어 접으면서 해진의 눈은 드라마를 떠날 줄을 몰랐다. 누구보다 자신의 해방과 안녕을 추앙하는 여주의 마음 뭐 그런 것에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잔잔한 물결 아래로 강한 물살이 출렁이며 해진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막혀있던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듯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목을 쭉 내밀어 빼고 한참을 집중하다 보니 폭닥한 수건은 가지런한 탑을 쌓았고 드라마도 끝이 났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는지 뻐근한 눈에 머리까지 아팠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저녁 장을 보기 전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 생각한 해진은 곧장 소파 위로 가 누웠다. 그리고 5분도 채 안되어 곯아떨어졌다.






깨고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해진은 저 시끄러운 뻐꾸기가 아니었다면 일어나지도 못했겠다 중얼거리며 다행이라 여겼다. 다행히 장 볼거리는 미리 메모해 두었고 시장바구니 역시 챙겨둔 덕에 별다른 준비 없이 신발만 신고 나갈 수 있었다.


"하마터면 규진씨가 올 때까지 자고 있을 뻔했네. 큰일 날 뻔했어. 가뜩이나 오늘 된장찌개 먹고 싶다고 아침부터 노래를 불렀는데 말이지." 해진의 이마 가장자리로 작은 땀방울이 옹기종기 맺혔다.


도보로 약 10분 되는 거리에는 동네에서 오래된 재래시장 골목이 있었다. 전통 시장이니만큼 먹거리뿐만 아니라 볼거리도 많았다. 항상 필요한 것만 사야지 생각하다가도 모련 시장만 들어서면 코를 들쑤시는 구수한 음식 냄새와 온갖 향신료, 수입 다과가 잔뜩 있어 그 이상을 구매하는 일이 많았다. 해진은 오늘도 과소비는 하지 않겠다 굳게 다짐하며 장바구니 안에서 너풀거리는 메모지를 꽉 쥐었다. 눈에 미리 담아만 둔다면 다른 데 정신이 팔리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평일 저녁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모련 시장은 온통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귀갓길에 잠시 들러 한 끼를 때우려는 자취생들은 물론, 전통 맛집 방문 후기를 인스타그램에 올리겠다며 들어선 젊은 남녀들, 평범한 가정집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분주한 주부들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좋을 때다' 하고는 곧장 단골 야채 가게로 향했다.


튼실한 팔이 보이도록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김씨가 열과 성을 다해 야채를 팔고 있었다. 싱글벙글 히죽대는 김씨의 가게를 들리는 날엔 쌓아두었던 걱정과 불안이 힘없는 홀씨가 되어 날아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해진 역시 그러했지만 아직 들러본 적 없는 이들이 김씨네를 왔다가는 날이면 두말할 것 없이 단골을 자처했다. 김씨 앞에는 야채가 아닌 아줌마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아마 특별 할인이 걸린 야채 3종을 둘러싸고 이리저리 밀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용기까지는 없던 해진은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하나둘씩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하자 해진은 그제서야 김씨에게 다가갔다. 목청이 터져라 '세일', '세일'을 외치던 김씨가 그 틈을 타 아이스 보리차를 들이키고 있었다. 물의 절반은 바닥으로 흘려보내며 '캬 시원하다'를 남발하던 김씨는 해진을 보며 놀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어이 해진 아줌씨 또 뭣이 필요해서 왔는감?"

김씨가 놀라 물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해진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재료를 빨리 사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물음에 답했다.

"아 김씨, 오늘 규진씨가 아침부터 된장 끓여달라 해서. 퇴근할 때 맞춰서 당근이랑 애호박, 양파 좀 사려고."

"에? 이 아줌씨가 왜 이려? 어제저녁에 와서 한 봉다리씩 사갔잖여."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김씨는 해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어제?"

"이이. 어제저녁에도 그 짝 아자씨 된장 끼린다면서 여서 온갖 야채들 쪼물딱 거리다 갔잖여. 기억 안나는겨?" "아아, 내가 그랬지 참. 내 정신 좀 봐. 기억난다 기억나." 당황한 기색의 해진은 발개진 볼에 손부채질을 하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워메, 내가 다 무섭게 와 그런댜. 고거슨 어제 사갔으니 다른 거 필요한 건 없는가 보슈."

"음. 어제 필요한 건 다 샀고... 마침 미나리 할인하니까 미나리 한단이나 사갈게요. 한 단만 줘요."

"그려 그려. 아주 싸게 나온 것잉께 거저 가져가는겨. 내가 좀 더 넣어줄게."

"고마워요. 나 갈게요."

"이잉."


단단히 묶인 검은 봉다리 안에는 해진이 생각지 못한 미나리 한 단만이 담겨 있었다. 해진은 방황하는 눈빛을 김씨가 볼세라 서둘러 시장 골목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곳까지 가 멈춰서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아침에 규진씨가 된장찌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어제저녁 늦게 얘기했나? 그래서 김씨네 다녀왔었나? 아닌데, 어제가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을 역으로 되짚어보아도 기억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어쩔 줄 모르는 당혹감에 굵은 땀이 뒷목을 흥건히 적셨고 해진은 윗입술 깨물기를 반복했다.

'오늘 아침 냉장고 열 때를 생각해 보자. 분명 야채칸이 비어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규진씨가 된장찌개를 해달라고 한 게 아니었나? 김치찌개였나?' 눈을 감고 검지 손가락으로 허공에 어렴풋이 어제를 그려보아도 뚜렷해지는 것은 없었다.


거듭 생각하려 할수록 해진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지기만 했다. 바로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해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갈수록 빨라지는 심장 박동이 귓등을 때렸지만 요 며칠사이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며 박자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서둘러 야채의 행방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김씨 말이 맞으면 냉장고 안에 호박이랑 다 있겠지. 일단 가야겠어.'


해진의 머릿속은 냉장고뿐이었다. 어서 서랍 안을 확인해야만 했다. 초조한 발걸음이 자꾸만 해진을 부추겼다. 멀리서 걸어오는 해진을 본 아파트 경비원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 마저 못 보고 지나친 해진은 빠른 걸음으로 208동으로 들어섰다. 머쓱해진 손을 뒤로 숨기며 경비원은 애먼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셈을 더해가는 숫자를 바라봤다. 세상이 좋아져 버튼 하나만으로 8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좋아했던 해진은 유독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느리다 생각했다. 열리는 문도, 닫히는 문도 천천히. 천천히 오르는 층수를 보며 해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8층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굳게 닫힌 문을 억지로 열어서라도 집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다.


"문이 열렸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에 코가 닿일 듯 가깝게 서있던 해진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절반도 채 열리지 않은 문 틈사이를 지나가 도어록에 손을 뻗었다. 녹슬어 잘 눌리지도 않는 도어록에 검지를 세게 눌러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문 손잡이를 덜컥 열어젖히고서 미나리 봉지를 현관 앞에 내동댕이쳤다. 제멋대로 날아간 신발안으로 미나리 몇 줄기가 떨어졌다. 해진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냉장고 앞에서 깊게 심호흡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있어야 해. 있을 거야. 있겠지.'


손금 사이사이로 축축함이 느껴졌다. 손톱 거스러미를 뜯으며 냉장고 문을 연 해진은 단번에 야채칸에 시선을 두었다. 반 투명한 서랍 안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것은 주황 그리고 초록빛을 보이는 묵직한 실루엣이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열었을 땐 김씨네 가게 로고가 새겨진 비닐과 그 안에 담긴 야채들을 보았다. 한참 전에 샀다고 하기엔 양이 많았고, 무르지 않고 단단했다. 가득 담긴 야채칸에 깔린 듯 해진의 몸이 축 처졌다. 어제의 야채가 아님을 필사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으나, 봉지 안에 구겨진 영수증 귀퉁이에는 떡하니 어제 일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왜... 왜 여기에 있지?... 대체 왜...'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