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기억은 점점 안개속으로

by 모티


해진의 마음을 눈치챈 작은 시곗바늘이 숫자 7을 가리켰다. 그리고 연이어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규진의 문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 5분 내로 도착해. 당신 좋아하는 것들 잔뜩 사서 가니까 좀만 기다려요 ^^.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뭘 좋아했지 나는. 좋아하는 것이 있었나.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 있게 말한 적이 있었나 해진은 생각했다. 지나온 페이지를 들춰가며 생각을 곱씹을수록 자꾸만 아득해졌다. 갈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고 그 혼란의 늪에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밑으로 점점 가라앉았다.


"여보, 오늘은 좀 어때?"

해진은 규진보다 그의 손에 들린 두 개의 울룩불룩 일그러진 장바구니가 먼저 보였다. 집은 물론이고 온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며 눈에 들어온 것은 모조리 쓸어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양이었다. 뒤뚱거리며 해진만 바라보고 빠르게 걸어오는 규진의 모습에 '못살아 못살아' 했지만 해진의 얼굴엔 웃음만 번져갔다.


"조금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잠도 잘 자는 것 같고, 생활이 어렵진 않아요." 처음 입소했을 때보다 해진의 안색은 훨씬 밝아져 있었다.


"엄마, 진짜 괜찮아요? 우리 알아보겠어?"

윤주와 진성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해진의 생소한 모습에 큰 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을 떨었다.


"괜찮아 지금은."


윤주와 진성은 장바구니에 넘치도록 담아 온 먹거리를 해진에게 자신 있게 열어 보였다. 우리가 이만큼 엄마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고. 기특하지만 또 어리숙한 이들의 사랑은 해진의 차가운 마음에 따뜻한 손난로가 되어 주었다. 손으로 그릴 수 없고 한 가지 크레파스로도 칠할 수 없는 오묘한 사랑에 취해있던 해진은 정 씨 할아버지의 콜록하는 기침 소리에 놀라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규진을 제 쪽으로 당겨와 귓속말을 전했다.


'여보, 지금 박 씨 할머니와 정 씨 할아버지 주무실 것 같으니까 밖으로 나가요. 나도 바람 좀 쐴 겸."

아차 싶었던 규진은 방금 비워진 장바구니를 다시 채워 넣었고 진성과 윤주도 정 씨와 박 씨의 눈치를 살피며 숨죽여 밖으로 이동했다.


병원 밖에는 환자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함께 거닐 수 있는 산책로, 야외 식사 테이블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긴 벤치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양껏 준비해 온 음식들을 한 아름 챙겨 테이블 위에 푸짐하게 펼쳐 두었다. 규진과 진성, 윤주는 해진이 좋아할 거라며 된장찌개와 버섯 조림, 호박전과 잡채 그리고 달달한 초콜릿 케이크, 사과와 포도까지 갖가지 음식을 자랑스레 선보였다. 하지만 해진의 취향에 딱 맞는 음식은 그곳에 없었다.


해진은 된장찌개보다는 소고기 뭇국을, 호박전보다는 감자전을, 초콜릿 케이크보다는 치즈 케이크를. 그리고 상큼한 샤인 머스캣과 오렌지를 좋아했다. 저녁 상 위에 자주 올랐던 반찬들을 해진이 좋아하는 것쯤으로 여겼던 이들의 천진난만함이 해진을 더욱 웃음 짓게 했다. 미숙하지만 정성은 갸륵해 속마음을 꺼내어 보이진 못했지만 전과 다르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욕구가 내면 깊은 곳에서 일렁이고는 있었다.


사실 해진에게 매일 같은 시간에 챙겨 먹는 끼니 따위가 중요할 리는 없었다.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계속해서 허기가 지는 느낌, 거듭 속이 텅 빈 기분은 잘 차려진 식사로도 채워지지 않았지만 진성과 규진, 윤주가 다녀가는 날이면 기분 좋은 배부름을 느꼈다. 점점 잃어가는 기억을 잡아둘 수 없어 이들의 기억을 먹고서라도 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은 해진이었다.


똑같은 일상만 반복되는 병원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흥미롭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해진은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더욱더 큰 목마름을 느꼈다. 윤주가 5살 무렵, 목에 사탕이 걸려 켁켁대고 있을 때 식겁한 해진이 효자손으로 윤주의 등짝을 두드려 패 사탕을 겨우 빼내었지만 등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 한동안 연고를 발라주었던 이야기. 또 진성이 8살 때, '쥬라기 공원' 영화의 여파로 침대에 큰 실수를 해버려 키를 뒤집어쓰고 옆집서 소금을 받아온 이야기. 또 어떤 날은 늦잠을 잔 규진이 급히 출근을 하려 버스 정류장까지 나갔는데 멀끔한 정장 재킷 아래 입은 다 늘어난 수면 바지를 보고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은 이야기.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해진은 더더욱 살아 숨 쉬는 듯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해진 역시 이들 앞에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툭툭 던져냈다. 비록 이들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불쑥 등장한 낯선 것들이었지만,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해진의 말에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그 시간을 나눴다. 규진의 얇은 니트 가디건을 걸친 해진은 이들의 웃음소리 위에서 마음껏 뛰노는 것이 좋았다. 정상과 동떨어진, 한참이나 뒤쳐진 느낌을 씻을 수 없어 괴로워했던 해진이었지만, 이 시간만큼은 근심 걱정 없이 같은 추억에 기댈 수 있어 행복했다.






하늘과 가까이 닿은 수담 요양병원, 이곳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자유로이 유영하고 있었다. 큰 별과 작은 별, 멀리 있는 별과 가까운 별.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고작 별들일뿐이지만 제각각 빛을 띠고 있음은 분명했다. 까만 하늘에 콕 찍어둔 점처럼 보이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가까이 다가서면 작은 별들 조차 제 모습대로 빛나고 있었다. 해진의 눈에만 들어온, 작지만 미세하게 반짝이는 아기별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새들도 모습을 감추고 크고 작은 소음도 잠들어갈 즈음, 규진은 날이 추우니 어서 들어가라며 해진의 등을 떠밀었다. 마침 병원 정문 앞에서 수간호사도 손목을 가리키며 면회 시간 종료를 알리던 참이었다. 윤주와 진성 역시 정리가 오래 걸리지 않으니 얼른 들어가 쉬라며 먼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바짝 서버린 솜털이 고스란히 느껴져 들어가야겠다 생각했다.


가볍게 손 인사를 건네고 병실로 들어가던 그때, 해진의 머리가 윙-하며 울렸다. 눈앞의 장면이 찌그러지며 순식간에 땅 속으로 꺼졌다. 빛 한점 없는 어두컴컴한 곳에 홀로 덩그러니 놓인 해진의 말문이 막히며 숨이 조여왔다. 손을 뻗어 닿아보려 해도 닿는 것이 없었고, 잡으려 해도 잡히는 것 없이 제자리에서 버둥거릴 뿐이었다. 까마득한 어둠은 해진을 단숨에 삼켰고 이에 어지럼증을 느낀 해진은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제 머리를 움켜쥐고 사정없이 때리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니야. 아니야!"

서늘했던 몸에 추운 바람이 다가와 해진을 세게 흔들었다. 피가 제멋대로 신체 곳곳을 휘적거리며 심장 박동을 더욱 빠르게 했고 목구멍에 큰 돌멩이가 걸린 듯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두..두...두고 가지 마. 나도 데려가. 안돼, 안돼!"

해진은 작은 물줄기에도 흔들리는 연약한 잔디풀을 꽉 잡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해진의 갑작스러운 증상에 화들짝 놀란 가족들은 정리하던 접시를 내팽개치고 해진에게 달려왔다.

"왜! 엄마 왜! 왜 그러는데 왜!"

"여보!"


벌써부터 울음바다인 윤주는 곧장 해진에게로 달려와 바닥에 앉아 해진의 등을 쓸어내렸다. 깔끔이라면 두말할 것 없는 윤주의 하늘색 청바지 무르팍은 물론이고 하얀 셔츠 소매 끝자락이 흙으로 더럽혀졌다.


"엄마 왜, 왜! 무슨 일인데 왜"

윤주는 떨리는 손으로 해진의 등을 어루만졌다. 얇은 가디건 위로 해진의 앙상한 등뼈가 온전히 느껴졌다. 더 퍼줄 것도 없는 사랑까지 먹고 자라난 윤주는 이 나이쯤 되면 자식 된 도리는 할 줄 알았지만, 막상 눈으로 마주한 상황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또 한 번 해진에게로 가 기대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여기 어디예요. 저.. 저 좀 데려가 주세요. 나 여기 너무 무서워요."

엄마는 방금 전의 윤주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저편에서 헤엄치는 해진을 보며 가슴이 저릿했지만 윤주는 옆 광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꾸역꾸역 말을 삼키며 해진의 말을 들어주었다.


"엄마, 나 윤주. 우리 방금 엄마랑, 아빠랑, 진성이랑 같이 맛있게 저녁 먹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울 엄마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네. 많이 안 다쳤지? 괜찮아, 괜찮아. 별 일 아니야, 괜찮아. 내가 엄마랑 저기까지 같이 갈 거니까 괜찮아. 나 여기에 있어."

윤주는 겁에 질린 해진을 꼭 껴안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어린아이가 되어 서럽게 우는 해진은 꺽꺽대다 윤주의 따뜻한 손길이 닿자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엄마, 내가 저기까지 같이 갈 거예요. 저기 간호사 선생님 보이지? 우리 손 잡고 같이 가자, 알겠지?"

"네 좋아요. 같이 좋아요. 고마워요 착한 언니."

경계심을 바짝 세운 해진은 윤주의 팔짱을 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질질 끌리는 신발에 흙먼지가 일었고 잠자코 있던 풀벌레와 휘이-휘이- 우는 호랑지빠귀소리가 해진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그럴수록 윤주는 해진에게 더욱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본 해진의 얼굴엔 눈물 자국이 선명했지만 엄마의 기억은 길을 잃어 저물어가는 빛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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