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수담요양병원에도 아침이.

by 모티


수담요양병원에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왔다. 지금쯤이면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을 시간이지만, 요양 병원은 부지런히 해진을 잠에서 깨웠다. 집을 두고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익숙지 않았지만 예상보다는 빠르게 적응한 편이었다. 해진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이 자신을 가족처럼 살갑게 대하는 것이 좋았고, 노년의 여유와 편안함을 만끽하는 이들을 보며 그 분위기에 스며드는 것도 싫지만은 않았다.


아침 8시, 입소 수속을 돕던 수간호사가 멀찍이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고 파이팅을 외치며 병실 곳곳을 돌았다. 병원 개업 시점부터 일을 시작한 수간호사는 소문답게 모르는 것이 없었다. 질병의 종류, 개인 성향 혹은 배경에 따라 환자를 어떻게 대했을 때 증상이 개선되는지에 대해 충분한 노하우를 갖고 있어 수간호사의 손만 거쳤다 하면 만사 오케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예로, 환자들이 처음 입소를 하게 되면 보통은 예기치 못한 신체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육체적으로도 쇠약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초반에는 움츠리다 못해 사람 대면자체를 거부하는 일도 잦아 침대와 한 몸이 되는 것이 흔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수담의 마더테레사 수간호사만 나타났다 하면 위축되어 있던 환자들이 180도 바뀌어 생기와 활력을 되찾고 증세 역시 개선되곤 했다. 이 일에 진심인 수간호사는 그런 미담이 자자할 정도로 환자들을 아끼고 제 가족처럼 살뜰히 대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역시도 수척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제 처음으로 입소한 해진이 신경 쓰인 수간호사는 아침이 되자마자 해진의 병실에 가장 먼저 노크했다.


"이해진 환자분, 어떻게 잠은 잘 주무셨어요? 처음 오셔서 낯서시죠 많이. 제가 그래서 기분 좋아지시라고 가장 좋은 창가자리로 안내드렸는데, 아실랑가! 불편한덴 없으셨어요? 혹시 생활하시다가 불편한 점 있으시면 여기 간호사 분들이나 저한테 언제든 말씀해 주시면 도와드릴게요, 아셨죠?"

가까이서 본 수간호사는 생각보다 지친 모습에 눈가 입가 잔주름도 많았지만 환자들의 고마움과 사랑을 먹고 자라서인지 그 마저도 아름다워 보였다.


"네... 아직 낯선지 잠은 잘 못 잔 거 같은데. 불편한 건 없었어요."

해진은 저보다 병세가 좋지 않은 다른 환자들도 있었는데, 유독 자신을 더 신경 쓰는 수간호사를 되려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다행이네요 해진 님, 오늘 아침 식사 곧 나올 예정인데 아직 드시는데 불편하신 건 없으시죠? 혹시 씹는 게 잘 안된다거나 어디 아픈 느낌 있으시면 꼭 말씀하셔야 해요?"

미세한 입가 주름 위로 작게 파인 보조개가 함께 움직였다. 해진은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늘에서 100년에 한 번씩 내린다는 천사'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네,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은 가득했지만 아직 울적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해진은 짧은 대답만 보이고는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어머, 우리 박 씨 할머니 아직도 주무시네. 밤새 주무시고 또 주무시나. 잠꾸러기네 정말! 이제 일어나서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아침 식사 맛있게 하셔야지. 우리 같이 일어나 볼까요? 으쌰!"

수간호사는 곤히 잠든 맞은편 박 씨 할머니를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복실 한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이마에 살포시 입맞춤했고, 박 씨 할머니의 어깨와 앙상한 팔을 주물렀다. 잠에서 덜 깨어 비몽사몽인 박 씨 할머니는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 듯했는데, 잘 들리지 않았던 수간호사는 '한 번만 더 말해줘요, 한 번만' 곰살가운 애교를 부리며 박 씨의 입에 제 귀를 갖다 대었다.


여태껏 상황을 온몸으로 거부하던 해진은 수간호사를 보며 꽝꽝 얼어있던 마음이 따스한 햇살에 눈 녹듯 사그라짐을 느꼈다. 사실 수담 요양병원은 해진이 원해서 온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선택으로 무언가를 항상 결정해 왔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던 일 중 수담요양병원에 오게 된 일이 가장 자신에게 편안하고도 또 필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진의 마음은 점점 차분해지며 제 자리를 찾아갔다.






수담 병원의 하루 일과가 몸에 꽤 익어갈 무렵 해진에게도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며칠 째 시달렸던 악몽은 가신지 오래였고, 중간에 잠에서 깨는 일 없이 깊은 단잠에 푹 빠져들었다. 병원 식사는 해진의 스타일과는 다소 달랐지만 건강을 위해 간을 슴슴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해진이 뚝딱 비운 식판을 정리하면서 수간호사는 들떠 물었다.

"우리 이해진 님, 오늘은 밥이 입맛에 맞으셨나 보네! 아 참, 그리고 오늘 무슨 날인지 아시죠? 요즘 가족분들이 바쁘셨는지 통 안 보이셨는데 오늘 7시쯤 오신다고 그러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을 텐데, 기분 좋으시죠?"


"네 들었어요. 며칠 제대로 씻지도 못했더니 몰골이 꾀죄죄해서 부끄럽네요. 머리도 한참 눌리고."

이토록 망가진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가족들에게 더한 걱정을 안겨줄 것 같은 생각이 해진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걱정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막막해하는 해진을 향해 수간호사는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있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래서 제가 오늘 머리 감으시는 거 도와드릴 거고, 조금 화사하게 보이실 수 있게끔 제 화장품 몇 개 챙겨 왔어요. 제 실력 기대하셔도 좋을걸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쭐대는 모습이 얄밉지 않고 이토록 사랑스러워 보인 적은 또 처음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간호사님, 매번 이렇게 도와주셔서.."

"무슨 말씀이세요 해진 님. 저는 환자분들이 이렇게 하루하루 평안을 되찾고 천천히 나아지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이에요. 그러니까 저 믿고,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금방 나아지실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편안하고 긍정적인 마음뿐이랍니다. 호호"

지혈 밴드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어 보이는 수간호사는 역시 소문대로 위아래로 널뛰는 환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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