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떡해요, 기억이 나질 않아요.

by 모티


하루아침에 일어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규진을 거쳐 진성과 윤주에게도 닿았고, 이들 일가를 무력하게 했다. 그간 가족에게만 전념했던 해진이 증세가 조금이라도 회복되면 그토록 고대했던 봄 나들이는 물론,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 부근으로 가족 여행을 다니자 했던 참이었다. 하지만 뒤늦은 바람이 이루어지기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정선생과 송간호사는 단월대 병원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장기 보호를 위해 전담 요양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했다.


"환자분, 우선 단월대 병원 연계 요양 병원으로 안내해 드릴 거예요. 마침 자리가 하나 있다고 하니 최대한 빠르게 전원 수속 밟으시는 것이 장기적으로도 훨씬 좋으실 것 같네요."

송간호사의 움직이지 않는 미간과 입꼬리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환자를 내보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정선생님께서도 이미 수담요양병원에 말씀을 해 주신 상태라, 이쪽에서 간단하게 정리만 하시고 넘어가시면 되세요. 내일 오후 1시에 수담요양병원 이동 차량에 픽업 요청을 해 두었으니, 시간 맞춰 이동하시면 됩니다. 수고하셨어요."


응급실 입원 수속부터 퇴소까지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상황이 얼떨떨한 듯 규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윤주는 무표정으로 시종일관 조용한 규진이 신경 쓰였지만 해진의 상태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는 듯보여 그 정적을 모른체해주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그나마 T성향에 가까웠던 진성은 막내아들 답지 않게 의외로 듬직한 면모를 보였다.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에서도 퇴소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요양병원으로 전원시 필요한 서류와 비용은 어떤지, 그리고 또 입소할 환자가 챙겨야 할 필수 용품 같은 것들은 또 무엇인지를 살뜰히 챙기며 해진을 챙겼다. 그렇게 이들은 뜻밖의 상황에 제 방식으로 놀람과 진정을 반복하며 현실에 적응해 갔다.






파란 글씨로 수담요양병원이라 새겨진 흰 카니발 한대가 이들을 태웠다. 시끌벅적한 차량 소리, 북적거리는 인파로 정신이 혼미한 도심을 지나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속이 시끄러운 마당에 주변 소음까지 더해져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는데 조금을 가서 벗어나니 울럭거리는 두통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창문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들과 풀 숲이 보였고, 그 사이마다 걸린 하늘과 아기자기한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그저 스쳐 지나가가 사라지는 것들은 의미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해진은, 오늘 창문으로 바라보는 풍경들이 낯설고도 소중하게만 느껴졌다. 나무의 색깔, 구름의 느낌, 집의 모양과 풀바람 소리.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나는 것들은, 기억나지 않아 기억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는 슬픈 사실이 가슴에 사무쳤다.


문 손잡이 구석에 위치한 문 열림 모양의 버튼을 누르자 카니발 문이 스르르 열렸고, 눈앞에는 설명으로 들었던 수담요양병원이 있었다. 병원 밖 오른쪽으로는 공원처럼 너른 들판 위 여러 대의 벤치 위에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고,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이들도 있었다. 걱정과 불안 따위는 없는, 오로지 행복과 기분 좋은 상상으로만 가득한 이곳은 죽음 이후 천국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따스하고도 포근히 느껴졌다.


"이쪽으로 오시죠." 차량 기사가 규진에게 손짓했다.


요양병원 내부는 단월대 병원과는 사뭇 달랐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안내 데스크에는 마치 이 병원에 오래 근무한 것처럼 보이는 간호사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맞이하고 있었고, 병원 안은 꽃이 만개한 꿈의 정원에 와 있는 듯 햇살같이 따뜻하고 구슬처럼 맑았다. 바닥재는 연 베이지의 미끄럼 방지 재질로 되어 있었고, 곳곳에는 충격 흡수용 몰딩처리가 되어있어 환자들의 안전을 특히나 더 많이 신경 쓴 듯 보였다. 양 쪽으로 길게 나 있는 복도에는 푹신한 손잡이가 있어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손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걷기 보조기를 잡고 천천히 복도를 순회하다 해진네를 발견한 한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이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해진 님? 단월대 병원에서 오셨죠?" 가장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수간호사가 물었다.

"네, 이쪽이 연계 병원이라고 해서 왔습니다. 접수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다렸다는 듯 진성이 이들 앞을 나서며 말했다.

"일단 서류는 오전 중에 팩스로 보내주셔서 받았고, 전화로 말씀주신대로 계약 사항 읽어보시고 여기 하단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입소 및 요양병원 이용 안내문은 여기 아버님께서 받아주시고요." 수간호사는 미리 출력해 둔 안내문과 공지 사항을 1/3 크기로 접은 후 하얀 봉투에 넣어 규진의 손에 쥐어 주었다.

"네, 사인 여기 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필요한 곳에 서명을 제대로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쓱 흝어본 수간호사는 말을 이어갔다.

"입소 등록 및 처리는 지금 다 되셨고, 주의사항 구두로 한번 더 말씀드릴게요. 면회 시간은 14시부터 16시, 18시부터 20시까지이고 예약까지는 아니지만 사전에 미리 연락을 주시는 것이 좋아요. 여러 환자들 보호자분들께서 한 번에 면회 오시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수간호사는 마치 전에 무슨 일이 있어 큰 곤욕을 치렀는지 진땀을 뺐던 상상을 하며 규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이해진 님은 오른쪽 복도 끝 112번 병실 사용하실 거고, 소지품 보관함은 침실 옆에 안내판 붙어있으니 참고해 주시면 됩니다. 혹 외출 혹은 외박 원하시면 사전 신청 미리 하셔야 하고. 안내문에 대부분 나와 있으니 찬찬히 읽어보시고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데스크의 안내를 받은 해진과 규진, 윤주와 진성은 112번 방으로 향했다. 복도 옆면에는 환자들이 평소에 주의해야할 사항과 낙상 주의 혹은 뛰지 않기 등의 기본적인 안내판 같은 것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수담요양병원에 어떤 환자들이 입소하여 치료를 받고 있는지 정도는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해진의 병실은 1개당 3명의 환자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는 단월대 병원에 비해 훨씬 넓고 쾌적한 상태였다. 환자 상태 호전에 도움이 되는 따뜻한 햇빛이 드는 넓은 통창, 일관된 컨디션에 필요한 가습기와 공기청정기는 물론이고,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아로마 향 오일도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해진은 같은 병실 안에서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인의 뒷모습에 눈길이 갔다. 기력이 쇠해 축 쳐진 어깨를 하고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간신히 끔뻑이고 있었다. 먼 미래에, 아니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해진도 저 휠체어에 앉아 끊어져버린 기억 조각들을 간직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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