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by 모티


몽실한 구름 위에 누운 듯 가벼운 기분,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햇살이었다. 푹신한 느낌에 폭 파묻혀 보드라운 느낌이 양 볼에 고스란히 닿았다. 약간의 잔 보풀이 일어나 있었지만 그 마저 부드러웠으며 소독약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지만 낯설진 않았다. 사그락 퍼석하는 이불 소리가 편안해진 기분을 한 층 더 맑게 해 주었다.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날을 세우는 찌릿한 두통에 시달렸던 해진의 얼굴엔 오랜만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조마조마하는 것들 없이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겠다 생각했다. 기분 좋은 상상에 잠겨 투명해진 아침을 만끽하고 있는데 터럭터럭 슬리퍼 끄는 소리와 함께 처럭하고 커튼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났다. 가까워진 느낌에 정신을 차리려 무겁게 내려앉은 두 눈꺼풀을 밀어 올려보았다. 얼마나 잠에 들어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눈꺼풀이 딱 붙은 것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비몽사몽 하며 내려앉았다 올랐다 하는 눈꺼풀 사이로 미세한 불빛이 서서히 새어 들어왔다.


틈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일렁이는 검은 물체가 해진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허공에서 무언인가를 휘젓는 듯했는데 그럴 때마다 익숙한 향기가 일었다.

"여보, 정신이 좀 들어요?" 어렴풋이 실눈을 뜬 해진의 얼굴 앞에서 규진은 양손을 휘저으며 생사를 확인했다.

"어... 으... 여버..." 반가운 마음과 달리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다 썩어버린 충치를 치료하려 잇몸 마취를 했을 때처럼 턱관절이 얼얼한 느낌에 뻐근하기까지 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몇 시간이나 누워 있던 거야.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무리해서 말하지 말고, 눈 감고 있어요. 간호사 선생님 불러올게." 일단 눈이라도 떠서 다행이라 여겼는지 규진은 이불 밖으로 나와 꼼지락거리는 손을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해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따뜻한 상황들이 생소하게 느껴졌지만, 해진은 싫지만은 않았다.


"선생님, 302호 이해진 환자 깨어났습니다."

종일 씻지도 못하고 해진 옆을 지키며 꾸벅꾸벅 졸던 상호는 떡진 머리를 쓱 넘겨 보이며 간호사를 찾았다. 최소한의 세수나 샤워를 하지 않고는 절대 밖을 나가지 않던 상호가 기름진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떠한지 알 것만 같았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해진을 살피며 제 부끄러움보다는 아내를 돌보는 것에 물심양면인 상호를 보고 병실 사람들은 저런 사랑꾼은 없다며 부러워들 했다.


"아 네, 곧 갈게요. 이해진 환자분 상태 확인하고 정선생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산더미 같이 쌓인 일거리에 키보드 위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송간호사가 화면만 응시한 채 무미건조한 대답을 이어갔다.


피곤에 절은 송간호사가 302호를 찾았다. 대충 묶은 똥머리 가운데 볼펜 하나가 끼워져 있었고 지렁이처럼 생긴 까만 글씨가 휘갈겨진 차트를 들고 해진을 불렀다.

"자, 환자분. 이해진 환자분 정신이 좀 드세요?"

해진을 불러보면서도 송간호사의 손은 차트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호는 침을 꼴깍이며 해진과 송간호사를 번갈아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어...으...여기 어디..에요...?"

해진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지 입을 뻐끔거리다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환자분 어제 기억나세요? 여기 단월대 병원이에요. 어제 빗길에 쓰러져 정신을 잃으셨고 급하게 응급실로 오셨어요. 기억 안 나세요?"

송간호사의 쩌렁한 목소리 덕에 말하고 싶지 않았던 해진의 사고의 전말이 302호 병실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냐며 저들끼리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혀를 끌끌 찼다. 간호사의 또박또박한 말소리에 해진은 눈을 감았다 뜨며 인상을 찌푸렸는데 희미해져 버린 어제의 기억을 되짚는 중인 듯했다.


쾅, 그리고 빵. 하는 소리와 함께 해진은 순식간에 어제의 횡단보도 위 빗길 위에 놓인 자신이 보였다. 머리와 얼굴을 타고 흐르는 차고 굵은 빗방울이 자신을 땅 속으로 끌어당기는 듯 온몸이 무거워졌고, 사방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해진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구석구석이 아파왔다.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환하고 또 한참이나 밝은 차량 불빛들이 해진에게 플래시를 터뜨리는 듯 위압감이 느껴졌다. 손가락 마디와 관절 곳곳이 뻣뻣하게 굳어오면서 시선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눈앞의 모든 경계가 모호해지며 우글거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해진 쪽으로 다가오며 해진을 에워쌌고 몸통을 조이는 듯하며 숨 쉬기가 답답해졌다. 그리고는 이내 그 자리에서 기억을 잃었다.


누군가 자신을 부축했고, 들것에 실려 옮겨지고 있다는 것이 흐릿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 떠오른 해진은 눈을 크게 떠 간호사를 바라봤다. 입은 움직임을 거듭하고 있지만 자꾸만 제멋대로 꼬여 튀어나오는 발음에 답답한 해진은 송간호사의 손을 잡았다. 송간호사는 해진의 손짓만으로도 그녀가 하려는 말을 이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트에 무언가를 또 적어 내렸다.

"환자 분 기억나시면 응 한마디만 하시고, 기억 안 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어..ㅓ ㅇ."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게 세상사라지만 이 말 한마디조차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잠에서 깨어나며 느꼈던 개운한 기분의 여운을 충분히 느끼기도 잠시 금세 또 숨 막히는 좌절감에 휩싸인 해진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이해진 환자분, 들어오세요."

단월대 병원은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규모가 가장 큰 대학병원으로 외래 진료를 한 번 보려면 자그마치 6개월이나 기다려야 할 정도로 예약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신경외과에서 이름 한번 들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정선생을 이렇게 빠른 시간 내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일이라고 들 할 정도였다. 규진은 해진이 눈을 떴고, 명의라 하는 정선생을 만난 것이 천운이라 여기며 해진이 곧 나아질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걸었다. 간호사의 부름에 규진은 해진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켰고 진료실 문 앞으로 갔다. 한참 동안 대기를 하던 환자들이 눈총을 쏘았지만 규진은 뒤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적막감이 감도는 진료실 안. 의사는 고개를 까딱이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곤 앞 의자로 손짓했다. 표정 변화 없이 모니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할 말을 정리하는 듯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 목젖을 타고 침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심장은 반 박자씩 더 빨라지며 무섭게 펌프질을 해댔고 규진과 해진은 진료실로 조심스레 들어와 잠자코 의사의 말을 기다렸다.


"자, 어제 추가 검사까지 진행한 것은 이미 남편분께 말씀드렸고. 스읍, 이해진씨 혹시 어제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나요?"

"..어..음. 꽤 자주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전보다 안정을 제법 찾은 해진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지금 상태로 보아 근래 들어 비슷한 증상이 잦아지셨을 테고, 기억이 뒤죽박죽이거나 두통도 심하셨을 거 같고. 흠, 신체 반응도 둔해지거나 경직되는 날도 있고 말도 가끔 안 나올 때도 종종 있으셨을 텐데. 맞나요?"

정선생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다는 듯 해진이 숨기 고팠던 비밀을 콕콕 집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네. 맞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영역이 들통나 죄를 지은 죄수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규진은 화들짝 놀라 해진을 바라봤고 숨소리가 빨라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과 같은 증상에 병원 진료를 받아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예상하신다면...상황이 꽤 많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서...선생님, 혹시 어떤.. 게 진행이 되었다는 말씀이신지요?" 모니터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규진이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검사 결과 상으로 보아 뇌 상태가 전반적으로 줄어있고, 신경 세포 수도 정상 범위보다 한참이나 뒤떨어진 상태입니다. 알츠하이머, 꽤 진행이 된 상태라 증상을 완화할 약물치료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네? 이 사람이 알츠하이머라고요? 그, 그.. 그 치매라는 말인가요? 이 사람이요? 규진의 입술이 사시나무 떨리듯 파르르 떨렸다.

"엄연히 다르긴 합니다만 퇴행성 뇌 질환 즉 알츠하이머가 진행되면서 치매의 양상을 보이곤 합니다. 뇌 전반에 걸쳐 위축이 일어나 있고 이미 많이 진행된 상황이라.. 더는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외 다른 증상들도 더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가족 분들께서 더 자주 들여다 보고 신경 쓰셔야 하고 일상 기능 저하가 올 수 있다는 점 미리 인지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결과를 담담하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하는 의사는 참으로 의사 다웠다. 감정의 동요 없이 팩트를 고하는 것이 무서우리만치 잔혹하게만 느껴졌다.


허탈함에 어깨를 털썩이며 떨리는 두 손을 부여잡은 규진은 말없이 해진을 바라봤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당장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라고 소리치기는커녕 담담하고 초연하게 반응하며 의사의 말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바닥으로 늘어지고 있었다. 살아생전 어깨 한번 제대로 펴고 살아본 적도 없었는데, 여태껏 웅크리다 못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 자꾸만 쪼그라드는 저 자신이 가여워진 해진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