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소공녀와 낯 선 엄마
소녀네 가족이 새집으로 이사한 뒤 엄마는 새로운 물건들을 많이 사들였는데, 그중에는 책들도 있었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 단편소설집, 예쁜 동화책들, 그리고 사진이 가득한 두꺼운 사진집 ‘LIFE‘가 있었다. 잡지가 귀하던 시절, 그 속에는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장면부터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들, 길거리의 키스 장면과 데니스 스톡이 포착한 제임스 딘의 흑백사진까지 담겨 있었다. 이 이미지들은 어린 소녀에게 강렬한 자극이 되었고, 소녀는 그것들을 머릿속 어딘가에 오래도록 저장해 둔 듯했다.
소녀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그림이 유난히 예뻤던 ’ 소공녀‘였다.
주인공 세라가 어쩐지 자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라의 아버지가 파산했을 때, 소녀는 너무나 슬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널,
저녁해가 동네의 집들과 미장원, 가게들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같이 출근했던 아버지가 퇴근해 돌아왔는데도 엄마는 아직 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집에 있던 엄마가 없는 날이 부쩍 많았지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소녀는 불안한 마음에 대문 밖으로 나가 엄마를 기다렸다.
귀청을 찢을 듯 울던 매미 소리가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가을이 막 문턱에 들어선 때였다.
반소매 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뚝을 모기가 물어 살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간지럽고 짜증스러워 빡빡 긁었더니 진물이 맺혔다가 곧 피가 배어 나왔다.
“연희야….”
어둑한 골목 끝에서 엄마가 모습을 드러내며, 누가 들을까 염려하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아빠 벌써 오셨어.”
엄마를 보자 안심이 되는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맞나…? 잠깐만, 잠깐만 이리 와 봐라.”
엄마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는 입김을 “하—” 불며 술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보니 엄마는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고, 양쪽 뺨은 봉숭아물을 들인 듯 불그스레 달아올라 있었다.
그날 저녁, 소녀에게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사십여 년이 흐른 뒤,
그 여자는 로버트 카파 사진전에서 뜻밖의 반가움을 느꼈다.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다.
빛바랜 유년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다.
오래전 잃어버린 일기장을 다시 펼친 듯한 기분,
설명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며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 두고 온 나를, 그곳에서. 다시 만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