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9화, 아이스크림 같은 평범한 일상

by 승연하


소녀가 국민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반에서는 반장과 부반장 대신 총무, 학습, 생활, 미화, 체육 부장을 남녀 한 쌍씩 뽑았다. 소녀는 그중 학습 부장이 되었다.


방과 후면 선생님 대신 다음 날 아침 자습 내용을 칠판 가득 적었고, 친구들의 숙제 검사도 도맡았다. 담임 선생님은 소녀의 엄마와 종친이라며 유난히 가까이 지냈고, 그 덕분인지 소녀를 무척 예뻐했다.

“우리 연희는 피부도 뽀얗고 얼굴도 복스러워서 딱 맏며느릿감이야.”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선생님은 소녀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부풀어 올라 뿌듯했다.


소녀와 함께 학습 부장을 맡았던 남자아이는 약국 집 아들 이성민이었다.

성민이네 약국은 소녀네 집에서 한참을 내려가, 새들이 많던 동네를 지나 더 내려가야 했다. 학교와 가까운 그 동네는 새소리 대신 사람들과 병원, 상점, 식당들로 늘 북적였다.

맛있는 자장면과 달걀볶음밥을 팔던 중국집은 영희네였고, 목욕탕 건물은 재홍이네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 건물 1층이 성민이네 약국이었다.


소녀는 성민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었다.

수업 시간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성민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 날은 코를 열심히 후비다가 또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제는 나를 안 좋아하겠지.’

그런데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성민이는 여전히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동화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숙제도 성실히 해내는 아이였다.

하지만 학교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시험 날이면 시험지 위에는 언제나 아는 문제보다 모르는 문제가 더 많았다.

시험지를 붙들고 한숨을 쉬고 있으면, 앞자리에 앉은 우등생 성민이는 눈치를 채고 이미 답을 다 적어낸 자신의 시험지를 소녀가 잘 볼 수 있도록 책상 끝으로 슬쩍 밀어두곤 했다.

성민이는 그렇게 소녀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 소녀는 열두 살이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작지만 사소한 사랑들 속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큰 조선공사의 영양사이자 주방장이었다.

별빛이 총총한 새벽에 나갔다가, 까만 밤하늘에 다시 별이 떠야 돌아왔다. 소녀는 아버지가 아침 늦게까지 주무시는 모습을 본 적도, 다정히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 월급 날, 온 가족이 인도 영화 〈신상〉을 보러 갔다.

언니와 남동생이 엄마의 양손을 차지해 버려, 소녀는 어색하게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처음에는 엄마 손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워 쭈뼛거렸지만, 이내 아버지의 손에서 전해지는 낯설지만 따뜻한 온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소녀는 아버지 손을 더 꼭 쥐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먹은 노릇한 통닭과 뜨끈한 뚝배기 삼계탕, 그리고 ‘초원제과’의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아주 조금씩 아껴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뺨에 닿던 서늘한 공기와 처음 잡아본 아버지의 투박하고 따뜻한 손, 그리고 자꾸만 아쉽게 사라지던 달콤한 아이스크림.

그것이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외출임을, 소녀는 알지 못했다.



이 글은 '그 여자' 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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