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항암 첫날
인도의 모든 일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여자는 다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뼈에 붙은 종양의 기세를 꺾기 위해 시작된 1차 항암날이었다.
간호사가 트레이에 담아 온 링거 약을 본 순간, 그 여자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선명하고도 섬뜩한 빨간색. 20년 전, 먼 타국 호주에서 항암 치료를 받을 때 보았던 바로 그 색깔이었다.
그 여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간호사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이거... 20년 전이랑 같은 약인가요?"
"삼중 음성 유방암은 아직 이 약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아요."
간호사는 피곤해 보였지만 습관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하는 시대라는데, 항암 치료의 시간은 어째서 20년 전 그 자리에 박제되어 버린 것일까.
구토 억제제를 미리 삼키는 것과 항암 다음 날 항생제를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어야 하는 것만 달랐다.
잠시 후, 혈관을 타고 차가운 '레드 데빌(Red Devil)'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그 약을 그렇게 불렀다.
붉은 악마가 몸속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콧구멍 깊숙한 곳에서부터 특유의 싸하고 락스와 알코올을 섞은 듯한 약 냄새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본격적인 고통은 시작도 안 했는데 기억이 먼저 반응한 듯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눈을 감고, 다시 시작된 이 긴 터널의 끝을 가늠해 보았다.
3주 후, 2차 항암을 하고 나면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 여자의 머릿속에 ‘이런! 다시 시작이네’라는 문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명상 수행과 마음 다스리기에 관한 책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네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을 기꺼이 수용하라’고. 하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마음 한편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집안 내력도 아니었다. 20년의 세월을 건너와 이제야 겨우 살 만해졌는데, 같은 암을 두 번씩이나 마주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 앞에 그녀는 하늘을 향해 따져 묻고 싶었다. '대체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크길래 이래야만 하느냐 ‘ 억울함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를 덮쳐 왔다.
자신의 삶은 시작부터 결핍이었던 것만 같았다.
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엄마에게, 그 여자의 탄생은 축복을 받을 틈도 없이 열세 달 터울의 남동생을 맞이해야 하는 일이었다.
고작 네다섯 살 무렵부터 그녀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보살피는 법부터 배웠다.
동생만이 소고기 장조림을 먹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던 기억까지 떠오르자,
애초에 자신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존재였다는 확신이 코를 찌르는 비릿한 주사약 냄새를 따라 혈관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번져갔다.
막다른 골목에서, 죽음과 맞먹는 고통의 벽 앞에 섰을 때야 사람은 살기 위해 자신을 돌아본다. 하지만 성찰이라는 고결한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통과의례가 있다. 평생 습관처럼 저어 온 피해의식의 노를 놓지 못한 채, '부정적인 생각의 바다'에 빠져 처절하게 허우적거리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