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

Ep1. 마지막회 13화, 미숫가루 그 날 엄마가 사라졌다.

by 승연하

소녀는 학교에서 새로 이사한 집까지 가는 새로운 길을 알아냈다. 새들이 많이 사는 부자 동네와 커다란 회색 철문이 있는 교회를 지나지 않아도 되는 지름길이었다. 거리는 짧았지만 대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급경사의 언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로 갈 때면 급격한 내리막 때문에 의지와 상관없이 몸무게가 앞꿈치로 쏠렸다. 다다다 발을 구르다 보면 중간에 멈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자칫하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기세였다. 반대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마치 암벽을 타듯 가파른 오르막이 앞을 가로막았다. 몇 걸음만 올라가도 숨이 차올라 가슴이 요동쳤다.

그날도 학교를 마친 소녀는 책가방을 한 번 고쳐 메고 언덕을 올랐다. 씩씩하게 발을 내딛으며 찬물에 설탕을 듬뿍 탄 미숫가루 한 사발을 떠올렸다.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큰 대접에 미숫가루를 타 주곤 했다. 얼음 몇 조각이 둥둥 떠 있고, 숟가락으로 저으면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그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떠올리면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언덕 끝에는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좁은 평지가 있었다. 그러나 안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 평지를 몇 걸음만 지나면 오래된 시멘트 계단이 나타났다. 집에 도착하기 5분 전, 늘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깔딱 고비’였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

낮 동안 햇볕을 받아 따뜻해진 계단 위로 소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소녀는 계단 아래에 잠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미숫가루를 떠올렸다. 그래야만 이 계단을 단숨에 치고 올라갈 힘이 생겼다.

하나, 둘, 셋.

소녀는 거의 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목구멍에서 뜨거운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올려놓을 때쯤에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계단 위에는 낮은 담장이 이어진 골목이 있었다. 그 골목 끝에 소녀의 집 대문이 보였다. 나무 대문은 햇빛에 바랜 채 조금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소녀는 헉헉대며 마루 앞에 신발을 벗으려던 순간, 소녀의 시선이 멈췄다.

아버지의 구두와 친할머니의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휴일 낮 말고는 집에 있는 모습을 거의 본 적 없던 아버지였다.

거기다 친할머니까지.

도대체 무슨 일일까.


소녀는 잠시 멈칫했다.

“엄마!”

연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일부러 더 크게 엄마를 불렀다.

“어… 연희, 왔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방문은 열려 있었다. 더운 날씨도 아닌데 친할머니는 부채질을 하고 계셨고, 아버지의 얼굴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엄마는요?”

“느그 엄마, 아니 권정자 그 여편네 도망갔다. 아이고, 남사스러워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고?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본다. 니, 그동안 뭐, 수상한 거 못 봤나?”

할머니의 날 선 물음에 소녀는 ‘도망갔다’는 말을 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오히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얼마 전 엄마가 늦게 귀가하던 날부터 소녀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가본 함박스테이크 식당. 그리고 몇 번이고 걸려 오다 받으면 끊기던 의문의 전화들.

하지만 소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하늘은 시릴 만큼 높고 푸르렀다.

사이다처럼 알싸한 바람이 소녀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오직 잠자리들만이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롭게 마당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 글은 '그 여자'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에피소드1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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