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엄마 없이 처음 건너는 길
얼마 후, 소녀의 집에 있는 모든 물건에 빨간 딱지가 붙었다.
할머니는 그것을 ‘빚잔치’라고 불렀다.
소녀는 며칠 전 사달라고 조르던 2층 침대를 아직 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합의 이혼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아이들은 친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흔히 어린 시절의 복은 부모 복이라지만,
소녀에게는 부모를 선택할 권한도,
할머니와 살게 된 상황을 거부할 선택권도 없었다.
할머니 집은 버스를 몇 정거장 더 가야 하는 낯선 동네에 있었다.
혼자 버스를 타본 적 없는 소녀를 위해 고모가 예행연습을 시켰다.
“이 정거장 잘 기억해라. 내리면 바로 시장이 보이지?
여길 따라 쭉 올라가면 된다.”
동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소녀의 손바닥에는 축축하게 땀이 찼다.
목구멍에는 커다란 돌멩이가 걸린 듯 답답하게 막혀 있었다.
“길 건널 때 차 오는지 양쪽 잘 살피고. 알겠지?”
낯설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 하는 길.
고모는 학교 위치와 쌀집 옆 파란 대문 집을 몇 번이고 짚어주었지만,
소녀는 점점 커지는 목의 이물감 때문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여름방학이 끝났지만, 한낮의 열기는 여전했다.
매미 소리가 귀를 파고들 듯 울어댔다.
정든 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마친 날,
소녀는 고모와 연습한 대로 동생의 손을 잡고 버스에 올랐다.
동생을 빈 자리에 앉히고,
소녀는 엄마처럼 그 옆에 서 있었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린 채.
평소에는 차 소리만 들어도 멀미를 하던 아이였지만,
그날은 긴장 탓인지 울렁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면서도 어딘가 차갑게 느껴졌다.
“학생, 바지 뒤에 피가 묻었어.”
낯선 아주머니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걱정과 민망함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소녀는 순간 굳어버렸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얼마 전, 언니가 천으로 만든 생리대 대신
일회용 생리대를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던 장면이 떠올랐다.
“…동생이 코피를 흘렸는데, 그게 묻었나 봐요.”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소녀는,
아이가 여자가 되어가는 동안
겪게 될 일들과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알려줄 엄마를
너무 일찍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