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트라우마와 멀미
“야, 너네 엄마 도망갔지?”
쉬는 시간의 소음을 뚫고 재홍이가 말했다.
키는 작고 머리는 컸으며, 두꺼운 안경을 낀 아이였다.
“얘들아, 연희 엄마 사기꾼이래. 그래서 도망갔대.”
소녀는 심장이 쿵, 발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네 엄마 이름 뭐냐? 신문에 다 나왔거든.”
“아니야. 아니라고!”
소녀는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그 떨림을 감추려 더 크게 외쳤다.
그날 이후, 쉬는 시간마다 재홍이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느새 몇몇 남자아이들까지 합세하였다.
“아니라고!”
소녀는 악을 쓰듯 외쳤다.
결국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러 꾸짖었다.
잠시 뒤, 선생님은 소녀를 따로 불렀다.
“괜찮니?”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은 끝까지 참은 채였다.
“재홍이 말, 다 틀렸어요. 선생님. 정말 아니라고요.”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소녀는 수치스럽고 억울했다.
그래서 어금니를 습관처럼 꽉 깨물었다.
울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끝까지 버티기 위해서였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예전에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아줌마가 찾아왔다.
아줌마는 퉁퉁한 몸에 햇볕에 그을린 피부,
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늘 소처럼 일만 하던 분이었는데,
그날도 일하던 중이었는지
음식 국물과 손자국이 묻은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었다.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초하루라 절에 가셨고,
고모도 며칠 전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어른들 안 계시나? 니 혼자 있나?”
아줌마는 마당에 서서 안을 힐끗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째 되는지 좀 들어볼라 왔드만은…
엄마 소식은 들었나?”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내가 곗돈만 날렸으면 이래까지 속 안 상한다.
우리 딸 광자 시집보낼라고 모은 돈까지 홀라당…”
아줌마는 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참말로… 어린 니한테 이런 말 해서 뭐 하겠노.”
잠시 소녀를 바라보던 아줌마의 눈길이 멈췄다.
“근데 니 얼굴이 와이래 노랗노? 어디 아프나?”
소녀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들어가라.
나도 가게 비아놓고 와서 빨리 가봐야 된다.
어여 들어가라. 내 간다이.”
아줌마는 등을 돌려 골목으로 사라졌다.
소녀는 눈에 힘을 주고 몇 번이고 깜박였다.
그러면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커다란 등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
목 끝까지 차오른 무언가를 애써 삼켰다.
또 멀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______
그 여자에게 멀미는 단순한 증상이 아니었다.
삶 내내 따라다니는 감각에 가까웠다.
직접 운전대를 잡아 시야를 통제할 때를 제외하면,
차멀미는 늘 그녀 곁에 있었다.
성인이 된 뒤에는 감기 대신
이석증이나 전정기관의 이상이 찾아왔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어지럼증과 멀미가 고질처럼 반복되었다.
그 시작에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서너 살 무렵, 당했던 유괴였다.
발견 당시 그녀는
좁고 어두운 가방 속에 갇힌 채
멀미로 인한 구토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고 했다.
의식의 기억은 지워졌을지 몰라도,
폐쇄된 공간에서의 흔들림과 공포는 그녀의 몸과 무의식에 깊은 낙인으로 남았다.
흥미롭게도
가장 예민했을 중고등학교 시절,
버스로 등하교할 때만큼은 멀미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안정이었을까,
함께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사춘기 성장의 호르몬 변화였을까.
그 시절은 그녀의 멀미 역사에서 유일하게 평온하고 고요한 구간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멀미는
몸이 기억하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통제할 수 없었던 흔들림,
벗어날 수 없었던 공간.
그래서였을까.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흔들릴 때마다,
소녀의 몸은 늘 먼저 반응했다.
울음보다 먼저,
속이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