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프다는 말을 몰랐던 아이
그날, 소녀는 학교에서 집까지 이어지는 가장 빠른 길을 포기했다.
대신 예전부터 알고 있던, 새들이 많이 사는 동네와 교회 앞을 지나가는 길로 돌아갔다.
목이 잔뜩 부어 있었고, 온몸이 쑤셔왔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학교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도, 방과 후 학예 발표를 위한 부채춤 연습도 끝까지 버텨냈다.
아프다는 말을 꺼내는 법을, 소녀는 배우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다.
언니는 조금만 아파도 금세 티를 냈고,
남동생은 아프기도 전에 엄마가 먼저 알아채 물어봐 주었다.
하지만 소녀는 달랐다.
아프면 울어도 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참는 것이 마치 특기라도 되는 것처럼,
홍역으로 열이 39도를 넘게 올라도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교회 앞을 지날 즈음, 소녀의 몸은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목은 바짝 말라 있었다.
소녀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무언가에 쫓기듯, 집으로 향했다.
엄마가 집을 나간 지 다섯째 날이었다.
어제부터 동네 아줌마들이 하나둘 집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소녀의 엄마가 계주였는데,
미리 받은 돈을 써버리고,
그 돈을 메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린 뒤
끝내 갚지 못한 채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엄마의 씀씀이는 컸다.
집을 사고 이사를 하면서
마치 부자가 된 것처럼 가구와 물건들을 몽땅 새것으로 바꿔 들였다.
그 모든 것이 당시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월급으로 감당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돈의 출처를 묻고, 멈추게 할 기회는 없었던 걸까.
엄마는 그때마다 어떤 말로 둘러댔을까.
그 여자는 어른이 되어서야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른들의 무지와 안일함, 그리고 잘못된 선택이
한순간에 삶을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 회오리바람이
결국 어린 자식의 삶까지 집어삼키게 된다는 것을.
소녀는 탈진 직전에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주전자째 들이켰다.
한참을 그렇게 마시고 나서야
집 안이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없었다.
“연희야…”
낯선 목소리에 돌아보니
마당에 친구 명신이와 그 아버지가 서 있었다.
명신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녀네 보다 조금 위쪽 동네의 하꼬방에서
다섯 남매와 함께 비좁게 살던 아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당이 넓은 2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갔고,
소녀의 엄마는 명신이 엄마를 ‘형님’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
명신이는 시립 합창단 단원들이 입는 원피스를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고,
그 손을 잡은 아버지는 말끔한 갈색 양복 차림이었다.
“아직 엄마 소식은 없나?”
소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이구… 어린 느그가 힘들겠네.”
그 말이 소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 힘들겠네.”
방금 전 들이켜던 물이 배 속에서 “꾸룩” 소리를 내며 출렁였다.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 순간,
목이 말라 삼켜버린 물인지
억지로 꾹 눌러 담아두었던 울음인지 모를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