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로 살고자 하는 게 뭐라 그리 큰 죄라고
내가 서울에 살고 있기도 하고, 서로 바쁘기도 해서
친구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만날까 말까였는데,
최근 2주 동안, 친구 두 명을 만났어.
적절한 우연과 기회와 시기덕분이었지.
얼마 전부터 서울에 올라와 살기 시작한 S 친구와는
서울 어딘가에서,
오랜만에 순천에 가게 되면서 만난 고등학교 친구 J와는
순천 어딘가에서 만났어.
S와 J는 서로 안면조차 없지만,
우리 셋은 지독히 비슷한 공통점이 있더라.
‘나로 살고자 하는데, 이것을.. 가족이 막고 있는 것’
이게 우리 각자의 지독히 비슷한 공통점이자,
요즘 우리 각자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는 고민이었어.
그리고 그 공통점을 더 세부적이게 말해본다면?
‘나로 살고자 하는데, 이것을 가족이 막고 있고,
정작 가족 자신들이 누군가를 막고 있다는 생각은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도움을 주어야하는데
힘을 더 쏟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어.
나와 S가 만날 때, 나와 J가 만날 때
우리는 잠시 동안이지만..
각자의 비슷한 갑갑함을 토로하며 해방감을 느꼈어.
동시에, 내가 그리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근거를
이 시간들 속에서 찾은 듯해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의 외로움은,
너무나 안 어울리는 감정이고 마음이라..
그저 혼란스럽거든.
우린 그 혼란스러움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나..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겠지?”
하는 문장을 내뱉으며, 각자의 외로움을 응원해 주고 있었어.
안타깝지만 외로움을 채워주긴 힘들었고,
그 외로움을 잘 버텨갈 수 있도록 응원해 줄 수 있었지.
나와 S는 서울에서, 나와 J는 순천에서
서로 다른 날짜와 시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어.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동안에는
그래도 우리 용기내보자는 말,
그래도 우리 내 인생을 살아보자는 말,
그래도 우리 후회 없는 시간을 쌓아가보자는 말을
시작과 끝으로 각자의 외로움 속으로 돌아갔지.
나와, S와, J는
그 각자의 외로움 속으로 돌아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이제는 그 외로움을 공감해주지 않는 그 시간에서
그 외로움을 오로지 혼자만 견뎌내야 하는 그 공간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혹시나 마음의 변화가 있었을까?
혹시나 가족의 말에 휘둘려 선택한 것이 있을까?
혹시나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을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하고 있을까?
혹시나 조금의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
.
우린 사랑을 위해 살아가고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건데,
그 사랑 중, 어쩌면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랑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의 사랑’이라..
우리는 이렇게 고통과 사랑을 한꺼번에 갖고 있는 거겠지?
그래, 고통 없는 사랑은.. 찐 사랑이 아닐 거야.
그렇지만 우리 셋이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은
‘사랑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꽤나 고통스러운 고통이네.
어쩌다 보니 S와 J보다는 조금 이르게
가족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우선시 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데,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깊은 고통을 겪고 있는 나로서..
S와 J에게
“제발 거기서 뛰쳐나오자 우리.. 제발... 그냥 우리 인생 살자”
라는 호소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어.
뛰쳐나오는 것보다, 뛰쳐나오고 나서의 시간이
더 오래 지속되는 고통이니까..
그 말을 뱉는다는 것은 용기를 주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무책임한 말일 수 있어서
그 한마디를 목소리로 꺼내어 S와 J의 귀와 마음에 전달한다는 것이
무서웠어. 많이 두려웠어.
‘상당한 고통을 감내해야겠다는 용기’는
그 어떤 용기보다 장착하기 힘든 용기였고,
그래서 나와 S와 J는 그 용기가 어느 정도 장착되어가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그러면 어느 시기에,
가족에겐 폭풍 같은 결정과 한동안의 시끌시끌함이 있겠지만
그 후의 평온한 나날들 속에서의 고통은 나름 감내할만 할 테니.
나와 S와 J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속에서 외로운 존재였어.
그래서.. 더 외롭고 추운 마음이었나 봐.
“헐.. 너도?”
“어.. 설마 너도..?”
하는 사소한 공감의 마음이..
우리 각자의 삶에 굉장한 힘이 되어주는 걸 보아하니..
우리는, 나를 극진히 아껴주는 가족들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거기서 또 작아지는 사람이었어.
작아질 수 있을 만큼 작아지는 사람이었어.
가족이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특권은
그들뿐만 아니라 나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터라..
더 숨죽이고 그들의 강압적인 의견에 억지로라도 끄덕여야만 했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나랑 살짝은 거리가 있으면서 나와 비슷한 친구를 만났을 때
더 안전함을 느꼈어.
‘나는 너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특권과 자격 같은 것은 없다.’
라고 보장된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린 안전지대에 들어온 것처럼
내 주위에 있던, 내 안에 있던 시끄러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어.
우리는, 가끔은 넘어지고 싶은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우리의 주위에 있는 가족들은
우리가 절대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의 앞과 옆과 뒤에 에어백을 잔뜩 준비해주기 바쁜 모양이었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도 안됐고,
발목이 삐끗해서도 안됐고,
살짝이라도 베이면 안됐고,
조금이라도 눈물이 나면 안됐어.
그런데 우리는,
가끔은 넘어지고 싶고,
가끔은 삐끗하고 싶고,
가끔은 베이고 싶고,
가끔은 눈물 나고 싶거든?
그래야..
더 재밌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서.
브라보콘과 월드콘 중에
월드콘을 고르는 것처럼..
우리는 안전한 인생보단
재밌는 인생을 원한 것뿐인데,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것들이
그들과는 조금 다를 뿐인데,
왜 이렇게 까지 무시를 받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S와 J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며
무서움의 감정이 든 것도 사실이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선택을 그들에게 맡겨버린 것처럼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선택권을.. 그들에게 줘버리면 어쩌지?
나도, S도, J도.. 제발.. 부디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제 넘는 소리일 수 있지만.. 순응하는 것보단
그냥 차라리 투쟁했으면 좋겠다.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이런 생각이 들면서.. 무섭고 두려웠어.
나 왜 눈물이 나지?
요즘엔 글 쓰면서 잘 안 우는데..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나 봐.
투쟁하라고.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계속 투쟁하라고.
네 삶을 쟁취하라고..
사실은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어.
아직도 난 싸우고 있어.
가족들은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과 나는 아직도 피터지게 싸우고 있어.
그래서 가끔은
‘하.. 그냥 항복해버릴까..’ 싶을 때도 많더라.
싸우는 과정도 힘들지만 그 전에,
그들과 내가 다른 편이라는 자체가 힘들어서.
나와 S와 J와..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힘들더라도 아니, 조금 많이 힘들더라도
계속해서 투쟁했으면 좋겠어. 삶은 쟁취하는 거니까.
.
.
S가 얼마 전 처음 취업한 회사에서 몇 주간 일을 배우며
이 회사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일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걸 느꼈지만
자신을 향한 기대감에 부푼 가족을 생각하며 버티고 버티다가
이젠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꾸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며칠 전 사직서를 냈대.
난 이 소식을 듣고, 정말 다행이다 싶었어.
동시에.. 기대되더라.
그녀가 이번 사건을 시작으로,
앞으로의 삶을 용감하게 쟁취할 것 같아서.
.
.
며칠 뒤,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어.
어떠냐고.
괴롭다더라.
‘내가 너무 나약해서 뛰쳐나와버린 걸까..?’
하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너무 괴롭대.
그 카톡을 읽고 난..
그 누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어.
그저.. 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선택을 하라고.
사실, 그 말밖에 해줄 수 없었어.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응원이 아닌 힘이 있는 용기였으니까.
.
.
나는 남자친구랑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는데
각자 자취방이 있다 보니 어떤 주는 우리 집에서,
또 어떤 주는 남자친구 집에서 만나는 패턴을 가지고 있어.
저번 주는 우리집 근처 카페에서 같이 공부를 하고
우리집으로 와서 같이 있는데,
남자친구가 화장실에서 자기 엄마랑 통화를 하고 나오더니
요즘 스트레스 받고 있는 가족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
평소에 남자친구는 그런 얘기를 잘 안 해.
‘얘기해봤자 달라질건 없고 더 막막해지기만 하는데
굳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과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데 이왕이면 기분 좋게 데이트하자’
하는 생각에서 묵직한 이야기를 안 꺼내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난.. 어느 부분에 대해선 궁금했지만,
괜히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 같아 그 궁금함을 참곤 했지.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그가 먼저 무거운 주제에 대한 말을 꺼내었고
나는 아주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어.
그는 차분하게, 또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어.
그러나 그 말속에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는 답답함과 무력감이
내포되어 있었지.
그의 말을 들은 나도
나의 가족으로 비롯된 나의 고민을 꺼내어 놓았어.
그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털어놓는 내용의 고민이었지.
그렇게 꽤 한참을 털어놓다가.. 감정이 올라왔는지,
아니면 나의 과거와 현재를 언제나 함께 들어주고 있는 그에게
고마움이 왈칵 쏟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물이 났어..
(대화하면서 그가 틀어놓은 잔잔한 클래식 음악 때문일 수도 ㅡㅡ;)
최근에 만나서 함께 고민을 나누며 조금은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던
나와 S와 J는.. 각자의 고뇌와 고민을 가지고 있었더라.
그리고..
자신의 치부이자 약점을 드러내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남자친구는
그날,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에게 꽤 오랜만에
어렵지만 또 고통스럽지만은 않게
그의 마음에 있던 이야기를 해주었어.
이렇게 보니 우리..
‘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싶으면서도,
‘그럼에도 꽤 멋진 삶을 살아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가장 밀접하고, 비밀이 없는 관계에서조차 우리는
숨기고 싶은 나의 치부, 나의 약점을
철저하게 숨기며 살아가고 있었더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언젠가 나의 치부와 약점을 꺼내야 하는,
꺼내고 싶은 때가 왔을 때 그때 비로소
나의 치부가 감당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어느 누구든 나와 비슷한 정도의 고통은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고통은 내가 살아가는 데
많은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워가고 있었더라.
나와 S와 J와 그는
때론 버거운 것같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의미 있는 각자의 방법과 상황들로
삶을 배워가고 있었어.
.
.
4월과 5월 그 한복판에서 그들은 마치 그들끼리 짠 것처럼..
그들과 나에 대한, 나와 그들에 대한, 그들과 그들에 대한
신기한 공통점을 하나씩 하나씩 선물해주었어.
우린 또 그렇게, 우린 또 이렇게
위기라면 위기고, 과정이라면 과정인 지금의 시기를
보내고 있나 봐.
.
.
남자친구와 우리 집 근처 카페에서 같이 공부를 마치고,
치킨을 포장해 집으로 돌아가려던 중에
뭐가 크게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거야.
나랑 그는 아주 깜짝 놀라서 이리저리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옆에 대학교가 축제여서 폭죽이 터지고 있더라.
(남자친구는 총소리인 줄 알았다고 ㅡㅡ;)
우리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처음엔 미어캣처럼 화들짝 놀라서
경계태세를 하고 있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니..
폭죽이 잘 보이는 쪽에 다들 모여서 넋을 놓고 보고 있더라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모든 사람들은 정지해 있었어.
그리고 나와 그의 발걸음도 정지할 수밖에 없었어.
하늘에서 터지고 없어지고 퍼지는 화려한 폭죽이
너무 아름다웠거든.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동안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감성이 꽤나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친구조차
큰 소리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폭죽을 빤히 쳐다보며
침묵을 유지할 만큼.
몇십초의 폭죽 이벤트가 끝이 나고..
우리는 다시 원래의 현실세계로 돌아왔어.
폭죽을 구경하기 위해 멈춰있던 사람들은
다시 움직여서 그들의 목적지로 향했고,
나와 남자친구역시 포장 주문해둔 치킨을 찾아가던 중에
폭죽의 기세에 압도당해 멈춰있던 발걸음을 다시 치킨집으로 내딛었지.
1분도 안 되는 그 시간동안 우리는
잠시동안이나마.. 현재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어.
정확히 말하면.. 현재만을 느껴도 되는 시간을 보낸 거지.
폭죽이 터지는 그 순간만큼은
가족 일에 대한 생각, 미래에 대한 걱정,
현실에 대한 두려움, 다가오는 시험, 곧 출시될 다이어리..
따위의 무거운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저 폭죽이 터지는 것을 바라보고, 바라볼 뿐이었어.
시끄러운 폭죽이
나와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지만,
어쨌든 그런 밤이었어.
시끄러운 폭죽이 잠시나마 우리를 평온히 쉴 수 있도록 해주었던 밤.
.
.
나와 S와 J와 그는,
또 어떤 밤을 보내게 될까?
밖은 시끄럽지만 마음은 평온한 밤,
밖은 고요하지만 마음은 혼란스러운 밤,
마음과 밖이 역동적으로 휘몰아치는 밤,
마음과 밖이 신기하도록 차분한 밤..
우리가 어떤 밤을 보내든,
그저, 그 누구의 마음에 들려 노력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마음에 들려고 애써보자.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정말 그렇게 한번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