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현실을 살아가는 걸까 현실과 멀어질 수 있길 바라며 살아가는 걸까
내일 저녁에 남자친구와 야구를 보러가.
아주 오랜만에 직관이기도 하고,
시험기간이 이제 막 끝난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도 오랜만이라..
많이 기다려져.
기다려지는 이 마음,
너무 설레는 마음이잖아?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기다려지는 마음, 설레는 마음을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더라.
왜일까?
그건 아마.. 그동안, 기다려지는 마음 때문에 벌어진
수많은 갈등과 위기가 떠올라서 그럴 거야.
다가오고 있는 그 하루에
기다려지는 마음이 커질수록, 설레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 하루에 대한 기대치도 함께 커져갔어.
최대치로 끌어올려진 그 기대를 잔뜩 안은 나머지
겨우 잠에 들고.. 드디어 그 하루의 아침이 밝아와 눈을 떴을 때
터질듯한 미소를 머금고 그 하나밖에 없는 하루를 시작했지.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하루가 엉망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어.
‘내가 상상한 하루랑 좀 다른데..?’
‘어? 아닌데.. 이 하루가 아닌데..’
‘응?? 아니 잠깐만.. 특별한 하루인 줄 알았는데..?’
내가 상상했던 하루,
내가 기대했던 하루,
내가 설레어했던 하루,
그 하루랑 완전히 다른 하루가 펼쳐졌어.
내가 치밀하게 짜놓았던 시나리오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나는 바로 예민해졌고,
나의 이 예민함을 본 그날의 파트너는
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
‘이럴 수도 있는 건데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하면서.
나는, 예상했던 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는 하루에 화가 났던 건데,
그 화를, 그날의 파트너에게 풀어버린 거지.
아무 잘못 없는 그날의 파트너는 당연히.. 억울하고, 화가 나고,
나아가.. ‘이 사람이랑 계속 연을 이어가도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기대하는 그 마음부터?
기대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파트너에 대한 애정부터?
.
.
그래,
기대하는 마음이 들기 전에,
기대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파트너에 대한 애정에서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어.
나와 어떤 날에 만나기로 약속한 그 파트너가
평범한 애정도를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면?
그날이 재밌을 거란 기대는 하지만,
그런 가벼운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
시나리오까지 쓰진 않을 거야.
그러나 남자친구는?
어쩌면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애정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그와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항상 꽤나 묵직한 기대와 시나리오를
자연스레 만들고 있었어.
한번은, 그가 순천에 있고 내가 서울에 있을 때였는데..
몇주 전부터 그가 서울에 올라오기로 한 날짜가 잡혀져있었어.
그런데 그날이 되기 하루 전, 남자친구의 엄마가 몸이 안 좋으시다고
우리 약속을 미뤄야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약속을 미뤄야하는 게 맞아.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거고, 엄마의 건강이 무엇보다 우선이니까.
그러나 그 당시에는?
부끄럽지만, 상황이 끝나는 대로, 엄마가 회복 되는대로
올 수 없겠냐는.. 여유 없는 소리를 했어.
.
.
남자친구를 만나면, 고통의 시간이 멈추는 듯했고,
남자친구와 빠이빠이를 하면, 고통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 듯 했어,
물론 지금도.. 그러한 느낌이 어느 정도 들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더 심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나마 버텨온 고통의 시간이,
내일이면 잠시 멈춰가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고대하고 기다리던 그날이 미뤄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예고 없이 또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생각에..
많이 고통스러웠나봐.
이렇게 여유 없는 내 마음은,
갈수록.. 그를 집착하는 마음으로 변질되어갔어.
사실.. 고통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들의 공통점은?
‘현실에 맞닿아있지 않을 때’이더라.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유튜브를 하염없이 새로고침할 때,
지금의 내 상황을 무시하려 무책임하게 잠에 들 때,
마음이 텅 비어있는 나에게 영양가 없는 음식들로 배를 채워갈 때,
시간의 공백을 어떻게 채워야 될지 모르겠는 내 삶의 시간들 속에
무의미한 약속을 잡고, 그 약속을 하염없이 기다릴 때..
.
.
그 순간들만큼은, 고통을 느낄 수 없었어.
그러나 그 순간들이 지나가면?
다시 내 고통은 시작되었어.
현실에 맞닿아있지 않을 때
잠시 동안 내 고통은 사라지는 듯했고,
서서히 현실이 뚜렷하게 다가올 때 즈음..
고통은 노크 없이 내 삶에 들어와 있었어. 이미.
그리고 나는 또,
현실과 멀어질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고 고대하며
현실에 대한 고통을 애써 감수하고 있었지.
그럼 나는,
뭘 위해 살았던 걸까?
뭘 위해 살고 있는 걸까?
현실을 위해? 아니면..
현실과 멀어질 수 있는 그날을 위해?
글쎄, 모르겠어.
다만 확실한 건..
현실을 위해 살았다면,
그런 삶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고.
현실과 멀어질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살았다면,
그런 삶에게 용기를 보내고 싶을 뿐이야.
사실 지금 이순간도, 잘 모르겠어.
현실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현실과 멀어질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너도.. 그렇지 않아?
너의 생각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현실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진 못해.
그래서 때론, 현실에서 최대한 멀~리 멀~리 달아나려 애쓰는 걸 거야.
삽시간에 현실에게 목덜미를 잡혀 다시 제자리로 오게 되더라도 말이야.
그러나 우린, 다 이유가 있을 거야.
현실에만 살아도, 불안하고
현실과 최대한 멀리 도망쳐 나와 살아도, 무서우니까
현실과 현실이 아닌 세상을 때론 위태롭게, 때론 편안하게 넘나들며
살아가고 있는 걸 거야.
나는.. 이때까지
현실에서 잘 살아가는 삶이
정말 좋은 삶이라 생각해왔어.
어쩌면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해.
적당히 늦은 밤에 잠드는 삶,
아침에 늦게 일어나지 않는 삶,
적절한 운동을 하며 지내는 삶,
괜찮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버는 삶,
꽤 흥미로운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삶,
내 고민과 생각을 가감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몇 명을 두고 있는 삶,
보기 괜찮은 외모를 갖추고 있는 삶 등등..
이 수많은 삶들이 모두 갖춰져 있을 때 비로소
내 삶에게 꽤 괜찮다는 말을 건네어줄 수 있었어.
그런데.. 이 모든 삶들을 갖추는 게 어디 쉽나..?
쉽지 않더라.. 특히나 나 혼자 나의 모든 삶과 시간을 운용해야할 때는?
더없이 어려운 거더라..
그리고.. 몇몇 삶들을 괜찮게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중 한두가지의 삶을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한 것 같을 때..
괜찮게 갖추고 있는 삶들은 안보이고, 그 한두가지의 삶만 보이면서..
나라는 사람이 작아지고, 더 작아지게 되더라고.
현실에 맞닿아있지 않을 때,
충분한 행복을 누리지만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
현실에 맞닿아있을 때,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만 충분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
이건 나에게 상당한 의문이었어,
그리고 동시에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더라.
‘현실과 맞닿아있을 때, 또는 현실과 맞닿아있지 않을 때,
온전한 행복과 충분한 행복을 함께 느낄 순 없는 걸까?’
라는 질문을 말이야.
이 글을 읽고 있을 너에게도..
물어보고 싶다.
현실과 맞닿아있을 때, 또는 현실과 맞닿아있지 않을 때,
온전한 행복과 충분한 행복을 함께 느껴본 적이 있어?
있다면 언제였어?
여전히 이 의문을 품고있는 나는 오늘도..
어느 시간엔 현실에 있다가,
또 어느 시간엔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온전한 행복과 충분한 행복을 이곳저곳에서 채우고 있어.
이게.. 맞는 걸까?
뭐.. 사실 세상에 맞는 것 틀린 것은 없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나의 삶에 어울리는 삶일까?’
하는 생각은 드네.
가끔은 이렇게, 또 가끔은 저렇게
가끔은 현실에서, 또 가끔은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게
삶이겠지?
우리의 모든 현실과 우리의 모든 비현실에게
마음 담아 우렁찬 박수를 보내며..
의문이 풀리진 않았지만 무언가 해소된듯한 느낌을 안은 채로,
이번 주제의 글을 마무리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