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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Jun 02. 2022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족 이야기

무병장수, 100세 시대.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 만연한 건강을 대변하는 슬로건으로 자주 보이는 말이다.

또 어느 순간부터 장수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한숨이 푹 내쉬어진다.
정말 100살, 아니 그보다 더 이상을 사는 게 행복한 걸까?
아무리 건강하게 지낸다고 해도 나 혼자서라면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걸까?



나의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3학년, 16살 때 췌장암 말기로 돌아가셨다.

처음엔 허리가 아파서 디스크인 줄로 알고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다가
통증이 호전되지 않아 검사를 받았었는데 결과를 보곤 큰 병원에 가보란 이야기를 들으셨다.

종합병원에 입원하여 *조영제를 이용하여 CT를 찍고 나서야 정확한 진단명인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그게 그 해 2월이었다.
(*조영제 contrast media, 검사나 시술 시 특정 조직이나 혈관이 잘 보이도록 인체에 투여하는 약물)

항암치료를 받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부모님의 판단하에 통증이 심한 때에는 호스피스 병동에 몇 주간 입원하며 어머니가 그 옆을 지키셨고, 나와 두 살 터울의 어린 동생은 가끔 울었다.
타인에게 큰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피해는 주지 않아야 한다던 말씀처럼 정직하고 소박하게 사셨던 아버지셨다.
자녀들에게 엄하셨지만 가끔가다 표현하는 애정표현들이 감사했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효도하겠다는 5월 8일의 약속의 카네이션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가족이었다.

그런 우리의 일상을 깨트린 암이라는 질병은 무서운 녀석이었다.

요리가 익숙지 않았던 나는 칼질을 하다 가끔 다치기도 했고, 밤이 되면 집안의 모든 창문과 문들을 점검하며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밤동안에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길 기도했다.

생일이 가까워진 시점에도 선물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아빠가 빨리 퇴원해서 오시기를 바랐다.




깨트려진 일상의 끝이랄까, 아님 또 다른 시작이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건 4개월이 지난 6월이었다.
아버지를 간병하셨던 어머니와 성심성의껏 간호해주시고 나를 이해시켜주시던 호스피스 병동의 수간호사 선생님으로 인해 나는 간호사의 꿈을 꾸었고, 결국은 이루었다.

그 과정 중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나와 가족들의 감정을 돌보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누구도 원망하지 못할 원망 속에서 슬픔의 시간을 보냈고, 매 해 6월이 되면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리움을 꺼낸다.


그렇게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어느덧 나는 아버지가 함께한 시간보다 아버지의 부재가 내 인생의 과반을 차지하는 시간이 가까워졌다. 많이도 울었고, 오래도 버텨냈다는 생각이다.
남은 세 식구가 끈끈하진 않았어도 각자의 역할을 해내느라 참 고생 많았다. 


그리고 나는 간절히 바란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나의 동생도 그리움으로 너무 오랫동안 아프지 않기를.
너무 그리워서 지금 저마다에게 주어진 행복을 놓쳐버리지 않기를.



최근에는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질환을 진단받은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과 노쇠함의 결과였다. 
*BMD 수치가 1년 전보다 나빠졌고, 여름이 가까워지니 기력도 없다고 하셨다.
(*bone mineral density : 골밀도. 뼈에 함유된 칼슘 등의 밀도를 말하며, 뼈 강도의 지표가 된다. 흔히 말하는 골다공증 검사가 해당된다.)


15년 전, 아팠던 아버지의 곁에는 어머니가 계셨다. 
그리고 15년 후인 지금, 노쇠한 어머니의 곁에는 멀리서나마 간호사가 되어 일하고 있는 내가 있다. 

내가 독립해서 같이 살고 있지 않기에 곁을 지키며 해드릴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지만 가끔 찾아뵙는다거나 건강과 관련된 부분이 궁금하실 때 연락해서 답변을 드리는 등의 나름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골다공증에 도움이 되는 주사제를 소개해드리기도 하고, 나름의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더 나은 치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선 내가 간호사가 되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지만 늘 더 해드리지 못함에 마음 한구석이 욱신한 느낌이다.



결국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하되, 함께 하는 마지막 날까지 남은 가족들이 큰 병으로 인해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기에, 더 많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삶을 살아내야 했던 우리였기에.
마지막 그 순간에 "우리 그동안 서로 고생 많았지, 고생했어, 이제 편하게 쉬어도 돼."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늘도 고생 많았지, 고생했어요, 오늘 밤엔 편히 쉬어요."라고 당신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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