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는 어디까지인가

by 헬렌켈러



나는 통제를 싫어한다.


소리를 지르는 통제도 싫지만

조용히 죄책감을 심는 통제도 싫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포장된 간섭,

“솔직한 것뿐이야”라는 이름의 상처,


그 모든 것에 오래 시달렸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통제를 경계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나를 조정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나는 즉시 선을 그었다.

설명했고, 지적했고, 구조를 짚었다.

논리로 되돌려주었다.


그게 정의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통제를 싫어한다면서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걸.


사람을 분석하고,

패턴을 읽고,

“이건 이런 구조야”라고 정리하는 순간,

나는 이미 위에 서 있었다.


맞을 수도 있다.

대부분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함이

곧 온기인 건 아니었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통제는 남을 움직이려는 욕구가 아니라

불안을 잠재우려는 습관일지도 모른다고.


불안하면

사람은 방향을 정하고 싶어 한다.

상대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틀리지 않으려 한다.

우위를 확보하려 한다.

그래야 안전하니까.


그런데 안전은

타인을 조정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내가 나를 다루는 순간에만 생긴다.


그래서 나는

통제를 재정의하기로 했다.

통제는

남을 고치는 힘이 아니라

내 반응을 멈추는 힘이다.


화를 느껴도

바로 내뱉지 않는 것.

간파했어도

굳이 말하지 않는 것.

상대가 준비되지 않았으면

설명을 멈추는 것.


통제는

나를 다루는 기술이다.


나는 이제

남을 바꾸려 하지 않겠다.


그 사람이 회피를 선택하면

그건 그 사람의 생존 방식이고,

그 사람이 높이를 유지하면

그건 그 사람의 두려움이다.

나는

그 두려움을 교정하지 않겠다.

대신

내가 선택할 자리만 정하겠다.

머물지,

물러날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통제는

본인만 하면 된다.


남을 움직이려는 순간

관계는 숨이 막힌다.


자유는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

나 역시 누군가에게

억압이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높이를 유지하되

우위를 쓰지 않는 사람.

구조를 보되

재단하지 않는 사람.

간파하되

조용히 물러설 줄 아는 사람.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은

이기는 쪽이 아니다.

편안한 쪽이다.


누군가를 눌러 안심하는 대신

나를 다스려 조용해지는 쪽


통제는

세상을 정리하는 힘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낮추는 힘이어야 한다.


나는 이제

남을 고치지 않겠다.

다만

나를 관리하겠다.


그게 내가 선택한

성숙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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