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수건 한 장

by 코업

여름 휴가를 얻어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끝에, 2년 전 가보았던 강원도 문막 명봉산으로 결정했다. 산 입구에는 동화마을 수목원이 있어 이곳을 둘러보고 나서, 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정자에서 1박 2일 백패킹을 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산인데다가 혹시나 장마철답게 날씨가 변덕을 부려 예기치 않게 비가 내리더라도, 정자는 지붕이 있어 적당히 머리 위를 막아주고 바닥이 평평해서 텐트를 치기 좋을 거란 판단이었다.

사본 -ChatGPT Image 2025년 4월 19일 오후 05_46_20.png

장마철이라 날씨는 가는 비의 연속이었으나, 일기예보상 저녁에는 그치는 것으로 나와서 내심 기대를 하고는 오후 2시 반쯤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급할 것도, 함께 가는 이도 없는 터라 통행료가 들지 않는 국도 노선을 선택하고 시동을 걸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서 동화마을 수목원에 도착했다. 우산을 쓰고는 앙증맞은 소품 장식들이 나뭇가지 군데군데 걸려 있는 예쁜 산책로를 걸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있고 아기자기한 장식품이 설치된 수목원 곳곳은 마치 내가 동화책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한 시간 가량 구경하고 다시 차 있는 곳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백패킹을 준비했다. 무게를 줄여야 했기에 물과 캔커피 등은 차에 놓아두고 큰 배낭을 메려는 찰라, 그래도 수건 한 장은 목에 둘러야 산에 오를 때 땀을 닦는데 요긴하게 쓸 거란 생각에 수건을 챙겼다.

떠날 때만해도, 수건 한 장이 밤새 나를 지켜주고 재워주는 존재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텐트와 매트, 물과 간식, 식사 거리, 랜턴 2개 등 다양한 품목들이 한가득 큰 배낭에 풍성하게 들어가 있기에 수건 한 장쯤은 없어도 그만이고 있으면 그런대로 필요한 소품으로 생각했다.

산은 육산이고 경사가 그리 가파르지 않아 약 10kg 무게의 배낭을 짊어졌음에도 걷기가 어렵지 않았다. 약간의 비가 내리기는 했으나 산길을 오르는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큰마음을 먹고 산에서 하룻밤을 묵겠다는 각오가 자기 최면 을 걸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는 길에, 인적은 전혀 없었다. 하긴. 유명한 산도 아니고 비까지 내리는 7월 하순의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에 사람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목적지 절반 정도 올랐을까? 비가 잠시 그치고, 잠깐 조망이 터지면서 멀리 나지막한 마을 풍경과 그 너머로 산 너울과 은빛 구름떼가 서서히 흘러가는 풍광이 보였다. 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모습은 마치 캄캄한 새벽을 지나 먼동이 터오는 순간처럼 빛나 보였다.

이내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다시금 비가 내렸다. 부는 바람에 나뭇잎에 쌓인 물방울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비가 내리는 건지 명확히 알기는 어려웠으나 아마도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되는 듯했다. 나뭇잎의 비와 하늘 비의 내림.

출발한 지 한 시간 20분쯤 되니 마침내 우람한 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오늘 밤 숙소라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으로 정자에 올랐다. 비록 지붕이 있다고는 하나 사방이 트여있는 구조라 온종일 내린 비로 바닥은 흥건히 젖어있었고, 테두리에 설치된 나무의자 역시 빗방울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텐트를 치고, 매트를 접어서 의자 위에 깔고는 준비해온 저녁거리를 소주와 함께 먹었다. 아무도 없는 산 정상 부근의 정자에서 먹는 식사는 너무나도 맛이 있었다.

어느덧 사위는 캄캄해졌고, 비는 계속 내렸다. 졸음이 와서 10시쯤 될 무렵에 텐트로 들어가 누워 잠을 청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으니 어느새 꿈나라로 영혼이 빠져들었다.

새벽 2시쯤. 소변이 마려워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비는 바람과 함께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자기 전에 확인한 바로는 자정쯤 그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인간이나 기계가 어찌 하늘의 마음을 측정할 수 있으랴.

문제는 추위였다. 잠들기 전에도 싸늘한 기운은 있었지만 술기운이 덕을 봤던 것이고, 자정을 넘은 시각에 센 바람이 불고 장맛비가 내리는 해발 600미터의 산 속은 내 체온이 감당하기 어려운 온도로 낮아지고 있었다. 침낭도 부피가 커서 놔두고 온 상태라 몸을 덮을 만 한 건 없었다. 무엇보다 등산용 반바지 아래의 종아리가 추웠다. 산 속이라도 7월 하순인데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냐는 생각은 완전 오판이었던 셈.

한 시간 이상 추위 속에서 잠을 못 이루다가, 본능적으로 목에 매고 왔던 수건을 넓게 펴서 종아리 위에 걸쳤다. 잠시 후 종아리가 조금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수건 한 장이 이불이 되어 추위에 노출된 살갗을 감싸 않았기 때문이다. 종아리에 따스함을 느끼며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도 두어 시간 더 잠을 잘 수 있었다.

만약에 이 수건 한 장마저 없었다면, 나는 긴 새벽을 뜬눈으로 지새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에서 세수를 하고 몸을 닦는 데 쓰는 수건 한 장. 평소 기념품으로 손쉽게 받는 수건 한 장. 이 흔하디흔한 물건은 나의 산에서의 1박에 추위에 떠는 살갗을 덥혀주고 잠을 청하게 해준 실로 고마운 존재였다.

짐을 정리하고 비 그친 산을 내려오면서 마주하는 나뭇잎들이 한 장의 수건처럼 모두 따뜻해 보였다. 나는 추운 누군가에게 한 장의 따뜻한 수건이 되어준 일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