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이 짜증 난다

할리갈리 사건

by 공글이

작은애의 방사선치료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총 27번 중에 12번은 뇌와 척추를 같이 치료했다. 뇌간에 남아있는 수모세포종이 뇌척수액을 따라 떠돌아다니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척추도 같이 치료할 때는 내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밥도 겨우 세 숟갈 먹고 종종 토했다. 지금은 머리만 치료하니까 밥도 한결 잘 먹고 구토가 줄었다. 아프기 전과 컨디션이 비슷한 수준이다. 놀이터에서 놀기 시작했다.

아이는 삭발 이후 모자를 쓰고 다닌다. 아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안 벗는다. 놀이터나 기차 안, 식당에서는 곧잘 벗는다. 사람들이 그다지 신경 안 쓴다는 걸 경험한 뒤로는 자유롭게 벗는다. 군데군데 짧은 머리카락이 남아 있어서 자칭 선인장 머리다.

어느 날, 작은애가 소아암 쉼터에서 할리갈리 보드게임을 하자고 꺼내 왔다. 처음에는 봐주다가 뒤로 갈수록 안 봐줬다. 결국 내가 이겼다. 작은애는 화를 내며 종과 카드를 발로 찼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나를 향해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야~!"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거실이었고 방마다 환자가 있어서 난감했다. 일단 문이 열려있던 방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문을 닫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후다닥 쉼터를 나왔다. 작은애와 한참을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냥 져줄 걸 괜히 이겼다.

큰애도 보드게임을 울면서 익혔다. 나는 상대가 어리다고 안 봐준다. 게임 시작 전에 선포한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정정당당하게 하자." 계속 지니까 애들은 분해서 운다. 그러다가 실력이 늘어서 끝에 이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는 같이 기뻐해 준다. 그렇게 실력이 쌓이고 나서도 나한테 온다. "아빠는 계속 봐주니까 게임하면 재미가 없어. 엄마랑 할래."

작은애는 화를 폭발적으로 낸다. 큰애 때처럼 하면 안 되겠다. 승부욕은 접어두고 져주는 연기가 필요하다. 할리갈리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쉼터에서 "어쩜 아이가 저렇게 조용하고 순하냐"는 말을 자주 들었다. 작은애의 고함 소리를 듣고 아마 놀랐을 거다. 안방 보호자에게서 장문의 카톡이 왔다. 게임할 때 져주면 좋겠다며. 반성한다. 아픈 아이 상대로 내가 뭐 했나 싶다.

부쩍 작은애의 짜증이 늘었다. 특히 식사 시간에 심하다.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 하니까 갈등을 겪는다. 어떤 때는 치료고 뭐고 간에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서로 마음을 모아도 힘든 판에 저리 짜증을 내니까 힘이 쭉 빠진다. 쉼터 엄마들이 아침에는 "오구 내 새끼"하다가 저녁에는 "이놈의 새끼!"로 바뀐다. 처음에는 살벌했는데 이제는 공감한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참을 인'을 새긴다.

"엄마는 너랑 지내기 힘드니까 다음 주에는 아빠랑 올라와라." 으름장을 놓았다. 아이가 눈만 깜빡이며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럼 티브이에 300번부터 만화 한다는 건 엄마가 아빠한테 꼭 말해줘야 해. 나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지? 저녁 시간에 '캐치티니핑' 한다는 것도 말해줘. 나는 엄마나 아빠나 상관없어." 작은애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우리 집에는 티브이가 없고 쉼터에는 있으니까 작은애가 내심 쉼터를 좋아한다. '캐치티니핑'을 보는 게 일과 중 가장 큰 기쁨이다. 할리갈리에서 이긴 게 무색할 만큼 '캐치티니핑'에 완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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