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는 공주가 될 수 없어." "왜? 나 대머리 공주 할 거야!"
27번의 방사선치료를 마쳤다. 치료 확인서, 영수증 등 필요한 서류를 챙기느라 분주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사람이 붐비는 병원에서 아이 손을 잡고 여기저기 다니느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방사선치료가 무사히 끝난 것에 감사하다.
작은애의 컨디션이 좋아져서 다음날부터 어린이집 등원을 했다. 바람직한 시간, 아침 8시 33분에 어린이집 차 타고 가는 모습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른 등원 차량 시간은 얼마든지 맞출 수 있다. 이제 항암치료가 시작되면 등원하기 어려울 테니 갈 수 있을 때 실컷 가라는 마음이다.
"난 대머리 공주야." 아침 먹다가 작은애가 선포한 말에 "대머리는 공주가 될 수 없어." 큰애가 정정해 준다. "왜? 나 대머리 공주 할 거야!" 작은애가 힘주어 말한다. 이로써 자칭 대머리 선인장에서 대머리 공주로 바뀌었다.
남편에게 "내가 오래 살 수 있을까?" 물었다. 옆에서 작은애가 대신 대답한다. "엄마 오래 살아야 해. 엄마 죽으면 나 강에 가서 악어한테 잡아 먹힐 거야." 따라 죽겠다는 말에 당황했으나 "우리나라 강에는 악어가 살지 않아." 큰애처럼 나도 정정해 줬다. 내 반응이 상당히 건조했음을 인정한다.
"엄마가 없으면 이제 불안해." 큰애 말에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방사선치료가 끝나기 한 주 전부터 큰애가 부쩍 울고 말수도 줄고 시무룩해졌다. 초반에는 "잘 때만 엄마 생각나고 한주가 금방 간다"라고 밝았던 큰애다. 그러다가 엄마 보고 싶은 시간대가 점점 앞으로 당겨졌다. 학원에서 생각나다가 학교로 빨라지고 이제는 1교시 때 집에 오고 싶어 한다. 잠깐 집을 비우면 큰애한테서 부재중 전화가 7통 와있다. 엄마 뭐 하냐는 문자도 늘었다. 다음 병원 일정으로 엄마랑 헤어질 생각에 벌써부터 울적해한다.
큰애가 귀신한테 쫓기는 꿈을 꿨다. 다행히 자기는 검은색 신발을 신고 있어서 살았단다. 꿈에서 아빠만 보였다는 말에 심적으로 엄마의 빈자리가 크구나 느꼈다. 큰애는 엄마가 서울에 가면 언제 갔다가 언제 오는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이제 여름방학도 시작될 텐데 큰애가 빈집에서 오래 있을 생각 하면 걱정이 된다.
작은애는 케모포트 수술이 많이 아플지가 최대의 관심사다. 항암치료를 위해 500원 동전 크기만 한 케모포트를 가슴 안에 심을 예정이다. 소아암 쉼터에서 지내보니 항암치료는 면역력이 떨어져 보이지 않는 균과의 싸움이었다. 거기다 항암주사의 부작용까지 나타나니 난코스다.
나는 하루하루 날짜 가는 게 겁이 난다. 뇌종양 진단, 수술, 방사선치료까지는 지나왔는데 56주짜리 항암치료가 기다리고 있다. 아침에 눈 뜨면 가슴이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싸하다. 작은애가 항암주사 부작용과 균과의 싸움에서 무사할까, 나는 엄마로서 든든하게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큰애는 길어진 엄마의 빈자리로 마음에 구멍이 나진 않을까, 남편은 힘든 내색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속은 괜찮을까. 떨린다. 치료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가도 무섭다.
스트레스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앞이 뿌옇게 보일 때가 있다. 옆에서 하는 말도 잘 안 들릴 때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다잡으니 내 상태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작은애가 아픈 후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