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이었나 아니면 그보다 더 어렸었나,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가느다란 잔머리가 내 볼과 이마를 어설프게 간지럽히던 무렵. 키는 아마도 정수리 끝이 엄마 갈비뼈 언저리에 왔을 때쯤. 엄마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간 적이 있다. 평소에 가던 마트와는 다르게 크기가 꽤 커서 휘둥그레 한 눈으로 신이 나게 구경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카트에 이것저것 담다 보니 어느새 갖가지 재료들이 소복이 쌓였고 서둘러 계산을 하기 위해 엄마와 함께 계산대에 서 있었는데 무심결에 옆을 보니 마트 안에 웬 서점 하나가 있는 거다. 알록달록 무지개떡 같은 책들이 호기심을 자극해 잠시 책 구경을 하겠다고 말한 뒤 서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책 저 책 만져보고 펼쳐보며 한껏 구경하고 있는데 세로형 책 선반 한편에 평소 갈망하던 ‘파브르 곤충기’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조심스레 꺼내어 갓난아기 뺨 어루만지듯 쓰다듬었다. 머지않아 계산을 모두 끝내고 온 엄마 앞으로 책을 들어 보이며 이 책을 꼭 읽고 싶다고 얘길 했더니 장바구니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으시곤, 그 속에 들어있던 영수증을 꺼내어 한참을 만지작만지작, 이리저리 살피다가 갑자기 장바구니 안에 들어있던 냉동만두 뭉텅이를 하나 꺼내어 “잠깐만 기다려봐”라고 하셨다. 그런 다음 성큼성큼 계산대로 다시 걸어가 그걸 도로 환불한 후 만두 대신 책을 사주셨는데, 그러면서 “만두보다 책이 더 낫겠다.” 하셨다. 이 사소하고 다사로운 기억이 죽기 전, 책 한 권을 꼭 쓰겠다는 다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