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나는 코로나 19 선별 검사를 네 번이나 했다. 두 번은 요양보호사로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선제 검사였고, 세 번째는 확진자와 밀접 접촉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추석 연휴 때 타 지역을 방문했다는 이유였다. 모두 증상은 없었지만, 막상 검사를 하고 나서 기다리는 동안은 불안하고 두려웠다. 특히 확진자와 밀접 접촉을 한 뒤에는 심장의 피가 다 마르는 것 같았다. 그때는 하필이면 당진에서 2주에 한 번씩 오는 남편마저 다녀간 상태여서, 남편 또한 검사를 받고 회사에 출근도 못하는 상황까지 되어버렸다.
만약 양성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아침저녁으로 돌봐드려야 하는 아버지는 어떻게 할 것이며, 우리 집 고양이는 누구 손에 맡겨야 하나? 방과 후 학교 강의는 당장 그만둬야 할 것이고, 낫는다고 해도 후유증으로 삶이 피폐해질 것이다, 등등 갖은 불안한 생각들로 밤을 꼬박 지새웠다. 이른 아침 보건소에서 <음성>이라는 문자가 올 때까지 잠도 자지 못하면서 불안한 상상들 속에서 입술이 하얗게 타들어갔다.
확진된 아이가 수업한 날 확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건소에서도 음성이 나오면 자가 격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마트에도 다녀오고 나름대로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해안도로를 혼자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마치 내 잘못으로 인해 확진자와 접촉을 한 것처럼 기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추석에 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딸 집에 가서 마트에서 시장 볼 때 외에는 6일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더구나 연휴 마지막 날 딸이 회사에서 내어준 코로나 진단키트로 검사를 해서 음성이 나왔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감염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을 했다. 또한 나는 백신 접종 2차까지 맞고 15일이 지난 상태여서, 어느 정도는 안심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타 지역을 방문한 자는 검사가 필수라는 교육청에서 온 메시지는 아무 증상도 없었지만, 보건소로 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보건소 앞에 두 갈래로 길게 늘어서 검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검사하다가 오히려 코로나에 걸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달려왔다. 이번에 만약 양성이 나오면 우리 가족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은 검사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무서웠다. 백신 2차 접종까지 완료한 사람들도 확진되었다는 뉴스는 나 또한 거기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잠을 자지 못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마스크를 벗고, 밖으로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마스크를 끼지 않으면 밖에 나갈 수 없고, 심지어는 집에서도 습관적으로 마스크를 끼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코로나 19 선별 검사를 하고 나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가을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설렘도 느끼지 못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아침 창가에 스며드는 햇살에 행복한 기지개를 켜고, 아랫집 남순 씨가 <언니, 햇살도 좋은데 우리 동네 한 바퀴 돌까요?>하는 전화가 달려오는, 설레고 행복한 가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갖은 생각으로 복잡한 마음을 깨고 음성이라는 문자가 왔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다. 코로나19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수없이 겪어야 할 일이라는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졌다.
앞으로 나는 몇 번이나 더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려야 할까.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로으로 인해 확진자가 3만 명 넘게 '발생하고 있는 요즘, 감옥에 갇혀버린 듯한 아득함이 온몸을 휘어 감고 있다. 부스터 샷을 맞고도 확진이 되는 이 상황에서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불안감으로 우울해진다.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트에 가는 발걸음마저 주춤거리게 만든 코로나 바이러스이지만, 그래도 믿을 수밖에 없다. 이 위기도 분명 지나갈 것이라고. 마스크를 벗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눈부신 봄햇살을 가슴 벅차게 껴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