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은 장편 서사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4월은 그의 표현과는 전혀 다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 같은 나뭇잎들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햇살은 은비늘로 부서지고, 하늘은 투명한 푸른 물감을 빚어내고 있다. 들에는 향기로운 쑥들이 봄날을 노래하고, 바위틈에서는 엉겅퀴와 할미꽃들이 살아있음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 연둣빛 새싹들은 다투어 나들이를 나오고 있다. 샛노란 민들레도 질세라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꿈꾸고, 미래의 행복을 그려나간다.
그런데 엘리엇은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했을까. 그것도 ‘가장’이라는 부사까지 붙여서 말이다. 詩속의 잔인한 4월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느끼고 보는 봄이 아니다.
황무지는 기술문명에 갇힌 인간성과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 대한 허탈감과 무력감에서 비롯된 ‘생명이 깃들지 못하는 문명’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그런 황폐 함조 차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경집⌜4월은 잔인한 달⌟ 참고)
지금 우리의 현실도 전쟁과 다름없다. 뉴스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을 세계 제3차 대전이라 말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잔인했다면, 제2차 대전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우리 민족에겐 잔인의 도를 넘어 잔혹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그 잔혹한 현실을 끈질긴 민족성으로 물리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제3차 대전이라고 지칭될 만큼 혼란스러운 이 현실도 꿋꿋하게 견뎌내고 있다. 잔인함을 뚫고 일어설 수 있었기에 잔혹한 현실도 이겨내고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잔인한 4월이 있었다. 유가족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세월호 사건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을 우리는 가슴속에 새겨 두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지난날의 고통을 잊고, 현재의 힘겨움도 이겨내야 한다.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리에 눈부신 새 세계를 세워야 한다.
봄이 온 지 오래되었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은 그 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들이 다투어 피는 꽃길도 걸어보지도 못한 채 보내야 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꽃들은 외롭게 꽃잎들을 떨어드리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믿고 있다. 4월은 분명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을. 4월이 지나면 눈부신 오월이 온다는 것을 말이다.
저만치서 오월이 오고 있다. 신록이 가장 아름답다는 오월이 우리에게 손 내밀고 있다. 오월이 오면 우리는 초록길 걸어오는 오월의 신부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오월 곁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너도나도 손을 잡고 무르익은 봄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4월은 잔인한 계절이 아니라, 아름다운 오월을 만날 수 있는 오작교 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21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