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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Mar 29. 2022

생활의 향기

인간의 이중성

 나는 가끔씩 세상을 향해 화가 날 때가 많았다. 왜 나만 이렇게 당해야 하나, 하는 억울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럴 때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차 오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잘 죽을 수 있을까 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된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릴 수 없었다.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어도 늘 혼자인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난 세상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 또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득한 원시 세계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가다 지구에 불시착한 사람’으로 나를 규정짓곤 했다.

 난 내가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부조리를 지닌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까뮈의 이방인 속으로 빠져들었다. 좌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신기루처럼 나타난 그에게 내 마음을 모두 주고 말았다. 그를 만나고부터 내 삶에 새로운 변화가 왔다. 책장이 하늘거리도록 읽고 또 읽으며 그의 생각들을 삼켰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물론 뫼루소는 까뮈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수많은 뫼루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뫼루소는 나의 또 다른 자화상이며 내 이웃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과 상관이 없는 사람을 죽이고도 죄의식은커녕 그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도 사람들이 가르쳐 주었을 뿐이라고 천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뫼루소. 그런 뫼루소를 두고 검사와 판사 모든 배심원들은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분노하며 사형을 언도한다.

하지만 그 판결은 또 하나의 살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애당초 신의 덕목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신이 준 것이라고 믿을 때, 모든 행위 또한 신의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는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 속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뫼루소만이 내 사고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다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조리(不條里)라는 것을 나누어 받은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인격을 분석하고 그 구성요소를 분간해낼 능력이 없다고 벌할 수가 있을까. 자신이 지닌 원시적인 심리상태를 증언하고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통념에 적응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냈다고 그 사회에서 추방시켜야 할까.

  원초적인 조건으로서의 부조리란 바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를 말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분리를 나타낸다. 통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망, 인간 정신과 주어진 자연이라는 극복할 길 없는 이원성 사이의 분리, 그리고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충동과 그의 존재가 가진 한정된 성격 사이의 분리, 인간의 본질인 근심과 그의 노력이 보여주는 허영 사이의 분리가 그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것을 보고 판단하여 그 사람의 이렇다, 하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정말로 이해 안 되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들도 우리 주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뫼루소 또한 그런 사람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눈물은커녕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한다. 이웃 사람이 죽어도 슬픈 법인데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냉소적이다. 더없이 건조하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고 하는 첫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충격적 이리만치 차갑다. 얼음처럼 냉랭하다. 감정의 찌꺼기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신지도 모른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없다.

 장례를 치르고 바다로 나가 여자를 만난다. 그것을 보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다는 물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한다.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은 결국 뫼 루소가 어머니를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호받으며 편히 쉬고 싶다는 본능인 것이다. 뫼루소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 놓고 슬퍼하지 않은 것뿐이다. 감옥 속에서 가끔씩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진실은 내면 깊숙이 감춰져 보이지 않는 법이다.

 현대인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고 싶어 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인가에 관심이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지어 버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큰 진실이 존재하기도 한다. 뫼루소는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 다만 나와 다를 뿐이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질타하고 이방인 취급을 한다면 세상에는 함께 손잡고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성격이 다르다. 그런 만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가지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부조리적이며 이방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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