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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경 May 12. 2022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범바꾸 할머니

  체한 것이 보름이 넘도록 내려가지 않는다. 혼자서 손을 따고, 지압을 하고 체기가 내려가는 운동을 하고 물구나무서기도 하였지만 나을 기미가 없다. 헬스장에 가서 5천 보를 걷고 거꾸리에 매달려도 보았지만 헛수고가 되었다. 가슴 안에 주먹 만한 것이 막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여 견디기가 힘들 정도다.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먹었지만 호전이 없다.

 잠도 오지 않아 밤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좋다는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까지 받았는 데도 나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병원마다 말하는 것이 모두 달라 당황스러웠다. 한의원에서는 찹쌀죽을 끓여 먹으라고 하고, 내과에서는 보리차만 먹으라고 하고 정형외과에서는 쌀죽만 먹으라고 했다. 어느 말을 들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찹쌀죽을 먹다가 쌀죽을 먹기도 하고 온종일 보리차만 마시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만 가고 증세는 점점 악화되고 있다. 

 불안감과 조급함에 2주일 만에 내과를 다시 찾았을 때 의사는 5일분 약을 더 먹어보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위내시경을 해봐야 한다고 했다. 혹시 암 같은 것일 수도 있느냐고 내가 조심스럽게 물으니까 그래서 내시경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불안하고 우울하고 슬펐다. 

 만약 암이라면?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애써 나쁜 생각들을 떨쳐내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가슴은 답답하고 정신은 더 맑아졌다. 배를 갈라 가슴속에 얹혀 있는 것을 모두 꺼내고 싶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새벽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일어나 다시 혼자서  손을 따는데 엄마가 보고 싶었다. 범바꾸 할머니도 그리웠다. 엄마가 계셨으면 시원하게 손을 따 주였을 텐데, 범바꾸 할머니가 계셨더라면 달려오셔서 객귀를 물리쳐 주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어릴 때부터 나는 유난히 잘 체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손을 따 주시면 낫곤 했다. 그래도 낫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체했을 때는 범바꾸 할머니가 오셔서 객귀 물리치는 행사를 치러 주셨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체한 것이 싹 내려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도 범바꾸 할머니도 계시지 않는다. 보고 싶어도 두 번 다시 볼 수가 없는 곳으로 가버리셨다. 

 범바꾸 할머니는 우리 집과 한 집 건너에 사셨는데, 친할머니 이상으로 우리에게 잘해주셨다. 친척이 없었던 우리는 범바꾸 할머니네 가족을 우리 일가처럼 가까이 여겼고, 명절 때는 물론이고 수시로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한가족처럼 지냈다. 나는 지금도 범바꾸 할머니가 나를 눕혀놓고 객귀를 물리치는 주문을 외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에고 고시네~구신들아, 잘 알아봐라. 여기가 어느 터전인가? 여기가 어느 터전인데 너그들 같은 잡구신들이 들어오노? 김간가? 이간가? 박간가? 너그들 이름 성을 어찌 다 이르노? 처자 죽은 불예수 구신, 총각 죽은 몽달 구신, 총칼맞아 죽은 노적구신, 아리리노질리 구신아…여자라면 X를 찢고, 남자라면 Y를 자르고 훠이훠이 물러섰그라. 이 칼 받아 안 물러서면 국내장내 못 맡고 무쇠가마 내리 덮어 씌워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한다. 안 그럴 때 썩 물러 섰거라. 에이 XX!”

 바가지 위에서 춤을 추던 부엌칼은 대문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서 대문 밖을 향해 섬찟하게 날을 세우며 누워버렸다. 그리고 범바꾸 할머니는 엄마한테 찬물 한 바가지를 달라고 해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으으윽!”하고 트림을 했다. 나는 무섭고 두려워 얼굴이 파랗게 질 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범바꾸 할머니는 그런 나를 잡고 흔들었다.  

 “야, 이 가시나야, 후딱 일어나거라. 다 됐다. 쪼맨게 객구는 왜 이리 자주 걸리니.”

 얼굴이 핼쑥해진 채 사시나무 같이 떨며 음식을 토해내던 나는 놀란 눈을 거둬들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순간 내 입에서 “으으윽!”하는 트림이 올라오면서 속이 시원해졌다. 범바꾸 할머니가 정말 객귀를 물리친 것이었다. 나는 언제 아팠냐는 듯 얼른 일어나 밖으로 달려 나가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았다.

 객귀(客鬼)란 사전에서 찾아보면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 혹은 잡귀(雜鬼)라고 되어 있다. 범바꾸 할머니의 말씀을 빌리면 객지에서 굶어 죽은 귀신인데 못 얻어먹어서 늘 배가 고프단다. 그래서 언제나 떠돌아다니면서 음식을 얻어먹는데 그 귀신이 붙어 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소위 객귀가 몸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라 했다. 객귀가 들린 사람의 증세를 보면 자꾸만 기지개와 하품을 하게 되고, 여름에도 어슬어슬 추우며, 음식을 토해낸다고 한다. 그럴 때는 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고, 반드시 객귀 물리치는 행사를 치러야만 한단다. 그 행사 과정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을 자주 본 나는 두렵기도 했지만 재미있기도 했다. 

 객귀를 물리치려면 우선 객귀의 밥을 지어야 한다. 미역, 물, 밥을 넣어서 솥에 넣고 끓인 뒤 바가지에 담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환자의 머리카락을 부엌칼로 스치듯 세 번 훑어서 음식이 든 바가지에 담고, 침 세 번을 뱉은 뒤에 객귀 타령을 시작하는 것이다. 객귀를 물리치는 데는 무엇보다도 욕을 잘해야 한다. 싸울 때도 욕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칼끝은 반드시 바깥쪽을 향해야 한다. 그래야만 객귀가 칼을 맞고 물러갔다는 증거가 된다. 환자의 증세가 심하지 않을 때는 객귀 밥 대신에 콩나물콩 3개와 물 세 숟가락을 입에 넣고 객귀 타령을 하면 낫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체기에 시달리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는 오늘, 범바꾸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이정희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 이름이 있는지 조차도 잘 몰랐다. 그냥 범바꾸 할머니로 통했다. 걸음을 걸을 때도 와닥 와닥 걷고, 욕도 잘하고, 동네에서 무슨 소리만 들렸다 하면 뛰어가서 참견하고 싸움도 잘 말렸다. 

 다른 사람들 눈치 보고, 혹시나 피해를 입을까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범바꾸 할머니는 체면 차릴 일도 혹시 욕 얻어먹을까 전전긍긍하는 일도 없었다.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언제 어느 때 어느 곳이건 당당하게 사셨다. 그분에게는 지위도 권력도 명예도 통하지 않았다.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다운 진실이었다. 눈빛 하나만으로 그분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사랑하고 아낌없는 정을 나누어 주셨다. 그런 범바꾸 할머니의 아낌없는 사랑이 특효약이 되어 체기를 가라앉게 했던 것이 아닐까.

 물질만능주의로 팽배해져 가는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특약이었던 범바꾸 할머니의 사랑이 오늘따라 너무 많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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