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
<짧은 소설>
서동요*
-유미경
"야! 내 애인 지나간다."
점심을 먹기 위해 공장 안을 가로질러 가는 인영의 앞에서 푸른 작업복 차림의 한 남자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너무 뜻밖에 당한 일에 질겁한 인영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쇳가루와 쇠붙이가 나뒹구는 공장 안을 빠져나와 식당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저 사람 정신이 이상한가 봐."
인영은 뒤따라 나온 영숙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은데…."
영숙은 인영과 동갑이지만, 3년쯤 전에 입사를 해서 공장이 돌아가는 형편이라든지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생긴 것은 멀쩡해가지고….'
정말 그랬다. 언뜻 본 얼굴이었지만 그 남자는 참으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서글서글한 눈이며 깎아 세운 듯 반듯한 코며 이지적이고 붉은 입술은 하얀 피부 위에서 참으로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은 콧등 위에 찍어놓은 듯 좁쌀만 한 크기의 검은 점 하나가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격증도 하나 없고, 배경조차 없는 인영에겐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공장이지만 사무실에 근무하는 것과 같다는 선배의 말에 입사한 곳이 방위 산업체인 P 회사 검사실이었다. 하지만 인영은 입사 첫날부터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품을 완성시킬 부속품이 나오면, 육안이나 게이지 안에 넣어 합격품인지 불량품인지를 골라내는 것이 인영이 맡은 일이었다.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 검사실 밖은 바로 공장 안이었다. 그곳에는 남자 직공들이 쇠를 깎고, 불량품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인영은 그 모든 상황들이 견딜 수 없을 만치 힘들었다.
출근하자마자 갈아입어야 하는 죄수복 같은 푸른색 작업복도 끔찍하게 싫었다. 당장이라도 사표를 쓰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당한 그 남자의 일은 그런 인영의 마음에 부채질을 했다. 입맛까지 없어진 인영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식판을 수거함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식당을 막 빠져나오는데, 식사를 하려고 서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팔 하나가 쑥 나오면서 인영의 어깨를 툭 쳤다.
"애인, 밥 많이 먹었어?"
인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백 미터도 넘게 줄지어 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인영을 향해 쏟아졌다. 반짝이는 눈빛들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예리한 촉수를 들이댔다. 인영은 취조당하는 죄수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모멸감이 들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 뒤부터 그 남자는 더 적극적으로 인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작업 시작 전에 하는 아침체조 시간에도, 매번 손을 번쩍 치켜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애인 안녕?"
퇴근버스 속에서도 눈을 찡긋하며 친근감을 표현했다.
"애인, 오늘 하루도 잘 지냈어?"
그럴 때마다 인영은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하지만 가슴속은 참을 수 없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당당하게
"내 애인!"
하고 소리칠 때는 뺨이라도 한 대 후려지고 싶었다. 인영에게 비친 그 남자는 결코 정상인이 아니었다. 인영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며 피해 다녔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용케도 인영을 찾아내어 달려왔다. 그리고는
"애인, 어디가?"
하고 능청스럽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인영은 어느새 공장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최남석이라는 그 남자의 애인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인영은 아침마다 출근하는 것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었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입사한 지 일 년 만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회사보안을 철저히 해야 하는 방위 산업체인 만큼, 입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사표를 처리하는데도 절차가 무척 까다로웠다. 아침 10시부터 시작한 퇴직 절차가 모두 끝이 났을 때는 오후 3시가 넘어 있었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어느새 그 남자가 달려오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내 애인, 오늘은 더 멋있네. 그렇게 예쁘게 차리고 어디 갔다 와?"
화가 날 대로 난 인영은 도끼눈을 하고 그를 몰아세웠다.
"이봐요, 최남석 씨. 나 오늘 사표 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최남석이라는 남자가 꼴도 보기 싫어서 그랬어요."
인영의 독기 품은 말에 미소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일 년 뒤 인영은 개인회사에 취직을 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찬 퇴근길 버스 속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승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빈 자석이 하나 있어 앉는 순간,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불쑥 말을 건네 왔다.
"인영 씨, 오랜만입니다."
고개를 돌린 인영은 제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 원수는 외나무나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앉아있는 남자는 바로 최남석이라는 사람이었다. 인영은 숨이 막혀왔다. 그가 또다시 애인이라고, 큰소리로 소리를 치는 날엔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영은 애써 그를 외면했다.
"인영 씨, 그렇게도 제가 보기 싫습니까? 하긴 그렇겠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미친 녀석처럼 공공연히 애인이라고 소리치며 다녔으니 인영 씨의 심사가 편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인영 씨가 입사 첫날 우리 부서로 왔을 때, 전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첫눈에 반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저한테 무심한 인영 씨에게 다가갈 용기가 없었습니다. 단념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선화공주와 서동의 이야기였습니다. 서동이가 거짓 노래를 퍼트려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나오게 한 것처럼 저도 그런 꿈을 꾼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가는 인영 씨가 회사를 떠나던 날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나마 인영 씨를 만나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저로 인해 마음 상하신 것이 있으면 다 용서하시고 잊어주시길 바랍니다."
순간 인영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은 것처럼 어지러웠다. 증오할 만큼 지긋지긋하고, 꿈속에서조차도 보고 싶지 않았던 그 남자가, 인영의 가슴속으로 쓰나미가 되어 단숨에 밀려들어 온 것이었다.
*향가 ⌜서동요⌟에서 제목을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