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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임 Feb 17. 2022

불국사의 손짓

불국사에 가면 그 바람을 해후할 수 있을까

 8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기고만장했던 무더위도 한 풀 꺾인다. 아침저녁으로 공기 내음부터 변한다. 여름의 냄새가 싱그러움이었다면, 이 시기는 풀잎의 초록 사이에서 짚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스며든다. 어린 시절 시골 외가에 가면 짚 태우는 것을 종종 봤다.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좋았다. 도시에 살면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절기에 지푸라기 냄새를 맡게 되면 ‘아, 이제 가을이 오는구나.’ 한다.     

 사계절의 체험이 가능한 지리학적인 위치의 한반도에 살면서 나만의 느낌으로 계절마다 바람의 특징을 정해 본다. 봄바람은 겨우내 꽁꽁 언 것들을 수줍게 깨우려고 표시 안 나게 와서는 사월의 벚꽃을 흐드러지게 날러버린다. 여름의 비를 머금은 바람은 심술궂게 강한 비바람을 몰고 우산을 뒤집어 놓아 얄밉다. 지친 더위를 위로해 주며 수확의 들판을 출렁이는 가을바람은 심장 박동 수를 높인다. 동장군의 겨울바람은 따스한 곳을 찾아 헤매게 한 뒤 움츠리게 만든다. 내가 선호하는 퍼즐을 조합해보면, 짚 냄새를 실어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가을, 그 가을의 바람이 좋다. 왠지 그 바람이 누군가를 데리고 올 것도 같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도 같다.     

 신입생 땟국물을 벗은 대학 2년, 이 학기 개강 첫날 캠퍼스는 따분했다. ‘나라사랑이 동기사랑이다’ 외치던 남자 동기들은 징용 가듯 우르르 군 입대해버리고, 예비군 야상 입은 복학생 선배들이 빈자리를 채워간다. 강의실의 열린 창문으로 상큼한 바람이 들어온다. 의자에 앉아 수업을 한다는 건 이렇게 좋은 날씨에 대한 배반이었다. 몇몇 친구들과 몰래 강의실을 빠져나와 무작정 부산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한 우리들은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경주와 밀양으로 좁혀지자, 동전 양면 게임으로 최종 목적지를 정하기로 한다. 10원 동전을 공중으로 던졌다가 잡아서 펼친다. 앞면... 경주로 낙찰이다. 각자의 지갑을 탈탈 턴다. 즉흥적인 여행인지라 경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젊음이 무기이자 배짱만 믿고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돌멩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는 스무한 살 우리는 기차 안에서 너무 재잘거려서 승무원에게 눈치를 받았다. 한참을 떠들다 보니 그새 경주에 닿았고 불국사역에서 하차했다.      

 차비를 아낄 겸 역에서 불국사까지 한 시간 거리를 걸었다. 길가의 사과밭에서는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간다. 과수원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달달하다. 바람도 맛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짚 냄새가 유난히 풍긴다. 천년문화유적의 고향인 경주는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어느 역사의 연대기에 와 있는 느낌이다. 저 멀리서 화랑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불국사 정문에 도착했다. 입장료가 예상보다 비싸다. 돌아갈 여비와 밥값조차 빠듯하다. 고민 끝에 불국사 담을 넘기로 한다. 입구 반대편에 덩굴로 담을 쳐 놓은 곳을 발견했다. 가시가 돋은 덩굴이지만 나무 작대기로 쳐내고 구멍을 넓혀 친구 하나가 시범 삼아 들어가 본다. 성공이다. 두 번째 친구도 무사히 통과한다. 세 번째 몸집이 있는 친구가 그만 끼어 버렸다. 안에서는 당기고 밖에서는 밀어도 막혀서 꼼짝달싹 못하고 아프다고 고함을 지른다. 우리를 발견한 경비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고 있었다. 구멍에 걸린 친구를 다시 밖으로 당겨 빼내어 줄행랑친다. 먼저 들어간 두 명의 친구도 겁먹어 도로 자진납세로 튀어나와 달린다. 경비아저씨 시야에서 벗어난 후, 얌전하게 입장표를 끊어서 불국사에 들어갔다. 불교신자도 아닌데 대웅전에 들어가 절도한다. 흉내 낸답시고 무언가를 빌었던 거 같다. 법당 한쪽에서는 108배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대웅전 사잇문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에 씻어본다.     

 점심때를 한 참 넘긴 시각이어서 배가 고프다. 명색이 절에 왔는데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까 싶어 스님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가보았다. 철없는 학생들이 배고프다 하니, 스님 한 분이 준비된 밥은 없고 대신에 사과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내오신다. 큰 고목나무 아래 옹기종기 앉아 사과를 먹으며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법명이 ‘정행’ 이신 스님은 한번 꺼내기 시작한 불교 말씀을 무려 2시간 넘게 이어 가신다. 서둘러 역으로 다시 걸어갔다. 해는 이미 서편으로 넘어가 땅거미가 지려한다. 낮과는 달리 저녁이 되니 들판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가 다르다. 한낮의 달달함은 사라지고 짚 냄새가 진하다. 부산행 차비를 제외하니 3인분 식비가 남았다. 우린 다섯 명이다. 역 앞 백반 집에 들어가 사정 이야기를 하고 김치찌개 3인분 주문했다. 아주머니께서 서비스로 공기 밥 두 그릇을 주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모든 그릇을 싹 비웠다. 배부름과 피곤함에 열차에 오르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열심히 차창과 박치기 몇 번 하고 나니 부산에 도착했다. 시간은 꽤 늦은 저녁이다. 도시의 바람은 살살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짚 냄새는 그 속에 없다.     

 한 번씩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왜 출석부에 찍힐 사선을 겁내지도 않고 캠퍼스에서 뛰어나왔는지. 무엇이 경주로 향하게 했고, 뭐에 이끌리어 불국사까지 갔을까? 그 후로 지금까지 수십 번 경주를 놀러 다녔다. 거리상으로 가까운 이유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맡았던 바람 냄새가 그리워 발길이 잦았는지도 모른다. 제2의 사춘기와도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대학 2년, 나는 많이 허전했다. 경주 불국사 가는 길 여정에서 달래며 채웠다. 그 바람이 그립다. 그 안에 묻어나는 짚 냄새가 더욱 생각난다. 이번 가을에 불국사에 가면 그 바람을 해후할 수 있을까. 불국사가 나에게 손짓한다.


                                                                                                                                         2021.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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