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벗어버리고 나는 조금씩 이곳에 물드는 거 같다.
퇴근 후 한 시간가량 동네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마땅히 할 만한 운동도 없고 해서 제일 편한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강렬했던 태양이 사그라드는 시간대여서 걸을만했다.
목줄도 없이 돌아다니는 개들이 제일 무서웠다. 이곳에서 개에 물리면 비행기 타고 나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여러 번 들은 터라 본능적으로 길거리에서 개들을 만나면 긴장하게 된다. 골목에서 소, 염소, 닭 등등 동물농장에 출연하는 가축들과 조우한다.
전에 와 본 적이 없는 큰길 안쪽으로 걷다 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양손에는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서 줄지어 어디를 가고 있었다. 따라가 보았다. 마을 공동 식수대였다. 여러 대의 수도꼭지 앞에 줄 서서 물을 받고 있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들고 온 물통에 물 채우기 바빴다. 식수를 받을 수 있는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나 어릴 적 우리 집의 수도도 물이 나오는 시간이 있었다. 깜빡하고 시간을 놓치면 낭패였다. 지정된 시간에 물을 큰 대야 물통에 받아 사용했다. 물을 아껴 사용하라는 할머니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맴돈다. 그러다가 물탱크가 생겨나서 집집마다 설치했고, 이제는 항시 수돗물이 나오기에 구태여 물을 받아놓는 수고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한국이 물 부족 국가라고 하지만, 물을 사용함에 있어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곳의 사람들에겐 매일 물통을 들고 물을 받는 것이 일상이다. 개울가에서 사람들이 씻고 탈의한 채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왜 집안에서 안 씻지?’ 의아했었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처럼 석회 함량이 높아서 생수를 별도로 사서 먹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형편이 많다. 물 한 잔이 귀한 만큼 물을 아끼는 습관이 길려지고 있다.
늘 넘쳐나고 풍족할 때에는 소중함을 망각한다. 한국에서 나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한답시고 마구 버렸다. 생필품이 부족한 동티에서 지내다 보니 버릴 것도 없지만, 버리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벗어버리고 나는 조금씩 이곳에 물드는 거 같다.
기숙사 근처에 다다르자 등에 땀이 흥건히 젖었다. 운동 후 마시는 물 한잔이 제일 맛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