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울 생활 이야기]
7-3. 한전과의 이설송전철탑 소송 전
한남 외인 아파트에서의 짧지만 진한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서울본부 공무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새로운 자리에서는 더 큰 책임과 폭넓은 엄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울본부 공무부는 단 두 명의 실무자가 서울과 한강 이북의 경기 전역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서울, 의정부, 구리, 남양주, 동두천, 포천, 고양, 파주, 양평, 가평...... 30여 개의 현장.
전기공사, 정보통신공사, 승강기공사, 옥외 전기공사 등을 담당했습니다.
100명이 넘는 현장대리인들이 있었고, 매일 그들이 가져오는 수많은 문서와 공무 업무를 우리 둘이서 감당해야 했습니다. 설계변경, 물가연동제, 기성서류, 주요 자재 승인, 현황관리, 민원 대응, 자금계획 및 실적 입력, 분양원가 산정 및 팜프릿 검토, 수시로 오는 문서 수발 및 회신, 소송 자료 제출 등...… 업무는 폭증이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나의 책상 옆에는 작업용 보조 책상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항상 서류 뭉치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현장대리인들이 새로운 서류를 들고 오면 그 옆에 순서대로 쌓는 식이었습니다.
급한 문서부터, 오래된 순서대로 검토했고 처리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야 해당 현장대리인에게 연락을 줄 수 있었습니다.
빠른 업무처리가 생존전략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엑셀 프로그램으로 물가연동제 지수 조정률 계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업체가 가져온 수치가 나의 프로그램 범위 안에 있으면 바로 승인을 내렸습니다. 하루에도 3~4건씩 물가연동제를 시행했고, 계약 건당 최소 두세 번은 연동 작업을 했습니다.
증액 연동제인 (ES)뿐 아니라 IMF 시절이라서 감액 연동제인 (DS)까지 경험한 시절이었습니다. 증액 연동제는 수급업체의 신청으로 시행하며, 감액 연동제는 발주처의 요청으로 시행합니다.
연동제 시행방법은 연도 별로 조금씩 변해 왔으며 25년 현재 기준,
계약을 체결한 날부터 90일 이상 지나고, 품목조정률(또는 지수조정률)이 3% 이상 증감, 공사계약의 경우 특정규격의 자재별 가격이 15% 이상 증감 시 시행합니다.
ㅇㅇ현장의 기성검사를 실시한 사례입니다.
기성검사자는 먼저 기성 서류를 검토하여 기성물량이 시공물량과 일치하는지를 파악합니다.
다음으로 현장에 가서 도면과 시방, 상세도 등에 적합하게 시공했는지 시공 상태를 확인합니다.
기성 서류 검토를 마치고 현장에 나갔는데, 세대 거실에 설치하는 콘센트 박스가 도면에는 4구 박스인데 2구 박스로 시공을 하였습니다.
나는 시공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였고, 그나마 2개 층만 콘크리트를 타설 하여 3층부터는 4 구로 바르게 시공하여 더 많은 오시공을 방지하였습니다.
물론 2개 층 전체는 매립된 2구 박스를 제거하고 4구 박스로 수정하였습니다.
기억에 남는 소송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전이 우리 회사를 상대로 “상계지구 이설 송전철탑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습니다. 재판은 몇 년간 중단되었다가 내가 근무할 무렵 재개됐습니다. 우리 쪽 변호사 ‘법무법인 바른’의 최○○ 변호사가 요청한 소송 자료를 찾기 위해, 나는 지하 창고로 내려가 먼지로 뒤덮인 10여 년 전의 서류를 며칠간 뒤졌습니다. 어렵게 찾은 자료를 들고 변호사에게 찾아가 설명을 덧붙이며 전달했습니다. 그 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판정에도 출석했습니다.
소송은 2003년, 양측의 중재와 협의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단한 서류의 무게와 낯선 재판장의 공기는 오래 남았습니다.
같이 일하던 주무 대리가 승진하여 공무부를 떠났고, 내가 주무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본사 전기설계처에서 후배가 보조로 들어왔습니다.
몇 달간 함께 일하던 그 후배가 어느 날 말했습니다.
“본사 설계처는 며칠씩 야근하면서 공사 발주를 끝내면, 잠시라도 쉬는데… 여기는 똥 쌀 시간도 없습니다.”
그 말에 나도 웃었지만, 그 말이 웃픈 현실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거의 매일 새벽 출근, 밤 10시 퇴근을 반복했습니다. 주 40시간제 같은 단어는 생소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30대의 넘치는 에너지와
2000년 연말, 사장님께 받은 한 장의 상장 덕분이었습니다.
그 상장이 내게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당신의 고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 인천본부로 발령을 받았고, 인천의 ㅇㅇ현장에서 같이 근무하던 전기직 후배와 함께 인천본부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서울본부 공무부에서 함께 고생하던 기계직 후배가 있었는데 같이 간 전기직 후배에게, 한쪽 책상에는 항상 서류 뭉치가 몇 개씩 쌓여 있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시절, 서울본부 공무부는 내게 있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진짜 의미를 알려준 곳이었습니다.
빠르게, 치열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기계처럼 돌아가던 하루,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람을 향한 책임과 성실을 놓지 않았던 나날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시간들이 내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