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울 생활 이야기]
7-4. 암 발병
서울에서의 삶은 치열함 그 자체였습니다.
거의 매일 새벽 출근, 밤 10시 퇴근의 반복.
온통 회사 일에만 매달리던 나날들,
그 사이, 아내는 아이 셋을 혼자 돌보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큰딸,
자주 토하던 큰아들,
그리고 서울에서 태어나 항상 업혀 있어야 했던 막내까지.
나는 그저 바빴고,
아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막내를 업은 채 아파트 복도를 걷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냥, 여기서 뛰어내리면...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깊은 우울감 속에서도, 아내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2003년 8월.
아내는 오른쪽 허벅지에 암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명은 활막육종.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암이라는 단어 하나로 세상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8월 12일, 서울대병원에서 3시간 40분에 걸쳐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후, 7주간 35회 방사선 치료, 3개월간 4세트의 항암치료.
항암치료 1세트 당 나흘,
첫날은 1시간,
둘째 날부터는 하루 10~12시간씩 항암 주사를 맞아야 했습니다.
나는 남편이자 보호자로서,
가능한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아내에게 쏟았습니다.
항암치료가 있는 날이면, 아침에 자가용으로 아내를 태워 병원에 데려다주고, 병원에서는 지하철로 출근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다시 병원으로 가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양가 부모님은 번갈아 전주에서 올라오셔서 아이들을 봐주셨습니다.
아내가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참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습니다.
회사 동료들, 교회 지인들, 친척들…
병실은 늘 문병 오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뜻밖의 이들로부터 병원비에 보태라며 전해준 봉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본사 신우회에서 전해준 100만 원 성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돈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떠오른 사람은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며 일하던 여직원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그 성금을 전달하며, 짧은 편지를 함께 남겼습니다.
“당신에게 더 필요한 이 돈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 2007년 7월.
회사 게시판에서 그녀의 부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말없이, 조용히, 세상을 떠난 그녀의 이름 앞에서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2004년 초,
아내의 병간호를 하며 시간을 쪼개 준비한 초급간부 승진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나는 6년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아내가 고향에서 편안하게 요양할 수 있도록 전주로 발령을 받아 내려왔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온몸으로 살아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하지 못한 슬픔은, 더 오래 마음속을 울립니다.
그러니 곁에 있는 사람의 침묵에도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글은 아내와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견뎌낸
가장 어두운 시간을 기억하며 남기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말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조용한 응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