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두 걸음♬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
고3으로 올라가기 전 겨울,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연출 전공으로 선택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던 나는 연출을 배우는 척하며 몰래 연기 수업에 몸담는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재수는 없다"라는 부모님의 당부에 현역으로 대학에 꼭 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나를 더욱 짓눌렀고
연기 수업은 내게 큰 두려움을 안겼다.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뛰고
불안감이 밀려왔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당시 19살 동갑내기 친구들이 뮤지컬 <빨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진행된 작품에서 나는 그들에게 갑작스레 나타난 생경한 이방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연기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내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다니... 차라리 구경꾼으로 남고 싶었다.
연기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들었으니까.
'진로를 다시 생각해야 하나…' 고민까지 할 정도로 소심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 강사님께서 나를 여주인공 '나영'으로 쓰겠다고 하시며 더블에서 트리플로 팀을 추가하셨다. 순간, 주변에서 날카로운 시선들이 내 몸을 감싸는 듯했다. 어떤 감정으로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벙쪄있는 상태였다. 축제에서 잠깐 경험해 본 연기 실력으로 나보다 연기 경험이 많은 친구들중에 내가? 주인공이라고? 심리적 압박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던 순간들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유려하게 잘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내가 계속 이대로 주눅만 들고 할 일을 못해내면 정말 웃음거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못하면 어때! 나는 너네보다 늦게 배웠고 안 해봤으니 부족한 건 당연하지! 이건 과정일 뿐이야.'
이를 악물었다. 내면에 잠식되어 있던 나의 승부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생각의 흐름이 달라지자 내 모습도 함께 변해갔고
그 변화는 나를 대하는 친구들의 방식에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황리에 공연을 마무리하며 나는 결국 내 몫을 해냈고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자신감의 원천은 오직 '연습'이었다. 연습이 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누구보다 오래 남아서 연습실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매일 밤늦게까지 쏟아부었던 노력과 열정은 나에게 더 큰 확신과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그 당시 수도 없이 들었던 MR, AR이 아직도 가슴 한편에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빨래>를 다시 볼 때마다 첫 전주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앉게 된다. 그 작품은 고등학교 시절로 나를 데려가 세속에 찌든 마음을 다시금 물컹하게 만든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관객석이 아닌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줄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관계자 분들 보고 계십니까?*^^*)
시간이 흘러 고3이 되었고, 나는 수험생의 신분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수시에서는 낙방을 하였지만 나름 상위권 학교들에서 1차를 붙으면서 나도 조금은 가능성이 있구나 작은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시까지 넘어가 지금의 학교에 붙었다. 내가 우리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천우희 선배님이 모교이기 때문이다.
사실 희망 순위에 없던 학교였다. 단순히 입시 선생님께서 연기 잘하는 애들이 많다고 추천을 해주셨고 인터넷으로 알아보던 찰나에 천우희 선배님이 나온 학교라는 말에 별 고민 없이 접수하게 되었다.
한창 영화 <써니>가 개봉하던 시절, 나는 고등학교 자율학습 시간에 선생님 몰래 50번 이상 본 기억이 있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준 배우이다. 연기 분야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한정적인 부분에 늘 아쉬움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나도 저런 배우가 될 수 있겠지?'라는 꿈을 품게 해 준 분이다.
가만히 있어도 치아의 마찰음이 가득하던 추운 겨울날, 정시 맨 끝 번으로 시험을 치렀다. 시험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묘하게도 ‘붙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준비한 만큼은 잘했으니 후회는 없었다.
김칫국 마시다 떨어졌다면 굉장히 민망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붙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허허.
신기하게도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동안 고생한 것을 이렇게 보상받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고3 수험생 일대기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고 마침내 시작되었다. 나의 20살 대학생활이.
뭐든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인 것일까...
입학하자마자 한 달간 쌩얼 유지, 애교머리 금지, 이름표 목걸이 빼지 말 것,
선배를 마주치면 달려가 기수 인사를 하라는 등등 전통이라는 핑계로 만들어진 황당한 규칙들에 숨이 막혔다.
누가 만든 전통인데요…?
동기들 중 예쁜 친구들은 특히 여자선배들이 물티슈로 철저하게 감시했다.
톤업 기능있는 선크림조차 용납되지 않았고 여자들만 규정 한 달 추가 벌칙을 받았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선배들의 호출에 10학번부터 막내 학번까지 모여 얼차려를 받았다.
시키니까 했다. 몰라서 했고, 무지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으면서도 납득하려 노력했다.
입학해서 이런 걸 하려고 그간 입시 지옥을 겪었나 싶어 힘이 빠졌다.
웃긴 건 1기 선배들은 이런 전통을 만든 적도 없다고 했다. 아아 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숨겨진 뜻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의미를 찾으려 했다. 찾으려 하니 또 찾아지더라.
개인주의 성향이 강했던 나는 단체 생활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잦은 집합과 활동을 통해 남을 위한 희생과
배려를 배우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친해진 친구들도 생기고 나름 적응도 잘 해냈다.
나에게도 달콤한 핑크빛 기류가 찾아왔지만 cc에 대한 로망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여자 선배들의 따가운 레이더 감시를 피하려 숨어 지냈던 날이 더 많았기에.
표현보단 숨김이 많았던 모든 게 서툴렀던 그때,
20살이 처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