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나이의 가장이 사망했을 때만큼 초라한 장례식장은 없습니다. 추운 날이면 공기는 더욱 매섭고 더운 날이면 한층 후텁지근한 채로 빈소는 휑합니다. ‘어떻게들 살아간다냐...’ 하는 실존적인 걱정에 한 동안은 그 유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 우두망찰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30여 년 전 아버지를 먼 길로 떠나보낼 때 그 빈한한 초상집을 찾아 주신 분들의 마음도 같으셨을 겁니다.
1984년 3월 5일. 당초 2학년까지 마치고 군대를 가려 했으나 어찌어찌해서 학생회의 중책을 맡게 되었고 그날이 개강이었습니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 새벽 미명도 한참이나 먼 시간에 주인집으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충북 영동의 성모의원이라는 작은 병원에서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네? 네? 정말 저희 아버지가 맞습니까?”
달포 전에 출장을 가셨습니다. 2주일 전 쯤 부산에 계신다는 짧고 투박한 편지와 함께 제 외투와 동생들의 옷가지를 사서 소포로 보내셨습니다. 출장 가시던 아침, 1학기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 드렸더니 "잘했다. 고맙다." 하시고 떠나셨습니다. 결국은 그 말씀이 유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 기차는 다섯 시에 있었습니다. 뜬 눈으로 새벽을 기다려 부랴부랴 집을 나선 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엄마와 저는 입을 꾹 다문 채였습니다.
우리 나이로 52세. 지금의 저보다도 젊은 그 나이의 주검이 흰색 면포를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누워 계셨습니다. 면포를 젖혀 핏기 없는 얼굴을 보아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통곡을 하시며 아버지를 흔들고 때리고 주무르는 엄마 옆에서 아버지의 발을 주물렀습니다. 3월 새벽 공기보다 더 차디찬 아버지의 발에서 비로소 죽음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급성 심근경색이었습니다. 전날 밤 늦게, 체한 것 같다며 숙소에서 양손의 손가락을 바늘로 따셨다고 했습니다. 토사곽란 끝에 어지럼증을 호소하시다가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습니다. ‘이 애들 데리고 혼자 어떻게 살라고’하며 통곡하시는 엄마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도 아득했습니다. 누나와 어린 동생들을 다독일 방법도 몰랐습니다. 문상 오신 손님들을 대하는 모습이 상주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어수룩했습니다. 친가와 외가 어른들께서 대소사를 수습하시는 동안 자리를 지킬 뿐이었습니다. 머릿속은 멍하고 눈은 초점이 흐렸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울지 말자고,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울면 그야말로 온 가족이 엉망이 될 것 같아 참기로 했고, 참았습니다.
하관(下棺)을 할 때 두 여동생이 아버지께 쓴 편지를 관 위에 올려놓으며 엉엉 울었습니다. 그 모습 앞에서는 견딜 재간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잃은 채 울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묻고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큰 슬픔에서도 해내야만 하는 일은 많았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위로하시던 주위 분들께서도 어느결에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은 훨씬 빠르게 흘러가는 법이니까요.
저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학교에서 맡은 일도 많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습니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이들에게 짐짓 의연한 척, 정중한 척 자세를 잡았습니다.
3월 말 1박2일의 일정으로 과 전체 M.T를 진행하고 왔습니다. 임원들과 막걸리로 뒤풀이를 하고 꽤나 늦은 저녁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안방 한쪽에 차려놓은 상에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렸습니다. 마당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수, 경칩, 춘분 다 지나 봄이 턱 앞이던 그 밤에, 그것도 투둑 투둑 소리라도 낼 것처럼 굵은 눈송이들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불현듯 충청도 한 구석 산자락 땅 속에 누운 아버지가 이 날씨에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들에게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숨이 멎으실 때 그 안타까움으로 눈을 부릅뜨시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억울함과 걱정으로 구천을 떠돌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불쌍해졌습니다.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쏟아져 내리는 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 보다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 울었습니다. 혹시 식구들이 소리라도 들을까 싶어 입을 앙다물고 숨죽여 울었습니다. 오늘 우는 게 마지막이라고 되뇌며 어느 새 쌓여가는 눈 위에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안타까운 나이에 먼저 먼 길 떠나신 가까운 이들이 여럿입니다. 세상 어느 죽음 앞에 남아 있는 자들의 고통이 없겠습니까만, 인연을 뒤에 남기고 떠나야만 했던 이들이 짊어졌을 그것만 하겠습니까. 하물며 안타까운 나이에.
한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오래 살았나 하는 시간의 총량만으로 성패가 구분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느냐는 세상의 잣대만으로 그 성패를 재단한다는 것 역시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아버지의 인생은 그야말로 철저히 실패한, 보잘것 없음 그 자체이겠지요.
마음으로 그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그가 나에게 주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쭉 나에게 미칠 유형무형의 무엇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지점에서 불쑥 떠오르는 그의 모습을 지금도 드문드문 발견하곤 합니다. 좋든 나쁘든 지금도 내 몸속을 흐르고 있는 아버지의 피, 디엔에이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그것과 같고 그러므로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기억할 뿐입니다. 그것이 저의 역사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흔 한 번째 아버지의 기일을 맞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이 있어 기억하며 읽습니다.
https://youtu.be/3T9tJYS7Mp8?si=73rHt2AMPsCz0Ko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