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너무나 신기하고 그래서 쉽사리 어울리기 어려운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1964년 겨울"의 포장마차가 얼핏 떠올랐다. 우리 네 명은 입구 쪽의 자리에 앉았다.
시커먼 안경의 최ㅇㅇ은 무람없어 보이지 않는 반존댓말로 할머니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홍합탕과 고갈비를 시켰다. 그러고는 칠성사이다 로고가 반은 지워져 버린, 할아버지사장님을 닮은 낡은 업소용 냉장고에서 막걸리 두 병을 갖고 왔다. 할아버지 사장님은 주섬주섬 찌그러진 양은잔과 시큰해 보이는 김치 한 보시기 그리고 '술고래'라고 양각으로 새겨진 노란색 플라스틱 통을 갖다주었다.
막걸리는 힘이 없어 보이는 반투명의 얇은 폴리에틸렌 병에 담겨있었다. 병 바닥에서 3분의 1쯤 높이까지 하얀 침전물이 가라앉았다. 최ㅇㅇ는 손등을 아래로 하여 막걸릿병 모가지 부분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잡았다. 그리고는 묘기처럼 손바닥을 서너차례 뒤집었다. 막걸릿병이 허공에서 거꾸로 물구나무를 섰다 바로 섰다 하니 침전물이 모두 섞여 병 전체가 뽀얀 콩물처럼 균질한 액체로 채워졌다. 최ㅇㅇ가 막걸릿병을 '술고래'에 담고 엄지와 검지로 병 모가지를 살짝 누른 채 뚜껑을 돌려 따는 순간 '포옥'보다는 강하고 '뽀옥'보다는 약한 소리를 내며 거품이 뚜껑 사이로 밀고 나왔다.
"에헤이~ 또 또!"
둥글이가 서둘러 냅킨을 갖다 대며 거품을 닦았고 최ㅇㅇ는 아랑곳없이 우리들 앞의 양은잔에 막걸리를 채웠다. 그새 거품은 삐딱하게 흔들거리던 테이블의 양철판을 타고 흘러 청바지를 입은 내 허벅지에 똑똑 떨어졌다.
돌아보면 그 당시의 막걸리는 예의범절을 호출하는 술이었다. 막걸릿병의 폴리에틸렌 비닐이 어찌나 얇고 부실하여 흐물거리는지 한 손으로 술을 따를라치면 병이 찌그러지고 구부러져 잔에 정조준을 하기가 어려웠다. 자연스레 한 손으로 병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공손히 병을 받쳐 술을 따라야 했으니 그야말로 동방예의지국의 향음주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제아무리 말싸움에 언성이 높다가도 상대편의 잔을 두 손으로 채우는 모습은 심히 아름답지 아니한가.
천상병 시인님
'술고래'통은 아니지만 이런 스타일. 구글에서 퍼옴.
1980년대 막걸리병
이 나약한 병은 종종 테이블 위에 홀로 당당하게 서 있지 못하고 넘어져 둘러앉은 이들에게 술방울 세례를 주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술벗들은 너나없이 냅킨을 든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으니 이 또한 아름답다할 만 한 것이었다. '술고래'라는 노란색 플라스틱 통의 효용은 이러므로 더욱 빛이 났다. 막걸릿병을 술고래에 넣으니 병이 쓰러질 일이 없었고, 그럼에도 병이 빠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받쳐야 하는 예의는 숭상되었다. 각설하고.
우리는 건배를 했다. 쭈욱 들이킨 내 생애 첫 막걸리 원샷은 신기했다. 신기하게도 잔을 입에 대니 바닥이 보일 때까지 잔이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인후를 향한 막걸리 스스로의 의지인 것 같았고, 신기하게도 이제까지 맛보지 못했던 청량감의 액체가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꿈틀거리며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신기하게도 액체임에도 가볍지 않고, 주정의 침전물이 섞인 것임에도 목넘김이 윤활하였으며, 신기하게도 달되 달지 않고 시되 시지 않아 그 맛이 오묘하고, 신기하게도 속이 든든해지는 느낌이었으며, 신기하게도 잔을 내려놓으며 나도 모르게 "흐아~"하는 날숨과 얕은 탄성이 쉬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 잔씩을 채우고 정식으로 통성명했다. 시커먼 안경의 최ㅇㅇ는 전북의 명문고를 나온 복학생 형이었, 아니 아.저.씨.였다. 둥글이는 서울의 중ㅇ고등학교를 나온 역시 복학생 형, 아니 아.저.씨.인 지ㅇㅇ였다. 순탄하게 진학 코스를 밟았다면 77학번이었을 텐데 인생을 논하는 재수와 철학을 논하는 삼수 등을 거치고 군대를 다녀온 늦깎이 신입생들이었다.
나는 남자 형제가 없다. 형이나 동생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었다는 이야기는 나의 부러움이었다. 동생을 쥐잡듯 잡았다거나, 형에게 대들었다가 쥐어 터졌다고 씩씩거리는 경험담, 그러다가도 형제가 힘을 합하여 악의 무리를 소탕(?)하였다는 과장된 형제애 등의 이야기는 부럽고 신기할 뿐이었다. 이날 나는 형들이 생겼음에 고마웠다.
최ㅇㅇ형과 지ㅇㅇ형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은 천일의 밤을 밝혔던 셰헤라자드의 그것만큼 흥미진진했다. 지금으로 보면 불과 20대 중반의 청년에 불과했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세상에 달관하고 무불통지한 형들이었다. 대학과 사회에서의 온갖 경험담과 대응 방법, 앞날에 대한 그림, 공부하는 방법, 사람들을 사귀는 방법, 술 마시는 방법, 술과 음악이 여자를 사귀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에 대한 여러 임상적인 결론과 노하우, 내밀한 바중의 이야기,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하게 들려주는 시국에의 통탄 그리고 비분강개, 마침내 군대 이야기까지.
최ㅇㅇ형의 방위병 복무 경험담으로 나는 당시 우리나라의 방위병들이 얼마나 막강한 전력과 포스를 갖추고 조국의 안보와 평화를 수호하는지 알게 되었고, 지ㅇㅇ형의 군대 경험담에 이르러 '육군 땅개'들의 신화같은 활약상과 고난에 경탄하였다.
왕왕, 진실이라고 받아들인 것들이 어느 시점에서 혹은 각성에 의하여 더 이상 진실이 아니거나 사실조차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최ㅇㅇ형, 지ㅇㅇ형, 그리고 그때의 수많은,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와 진실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날 길모퉁이 까페에서 나눈 모든 이야기는 내게 여전히 진실로서 새겨져 있다. 감히 칸트의 인식론을 견강부회하자면 내 밖에서는 존재하되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였기에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던 세계와 사물과 이야기들이 형들의 이야기를 타고 비로소 내게 '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문리대 농구 대회를 위한 주도면밀한 작전과 훈련 계획을 세웠다. 우승의 예감이 젊은 혈기를 타고 넘쳐 우리는 몇 곡의 노래를 불렀다. 할아버지사장님은 '이놈들아 시끄러' 짐짓 핀잔을 주었고 마침내 자신의 예리한 음주상태검증노하우에 따라 우리에게 더 이상 술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편협하고 왜곡된 압제적인 선언에 분연히 항거하였으나 끝내 추방되었다.
우리 집은 학교와 5분 거리의 지척이었으나 나는 그날의 귀가경로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다음 날 아침에 콩나물해장국을 끓여 내온 엄마로부터 그 국보다 뜨거운 지청구와, 걱정하며 출근한 아버지의 경고를 들어야 했다. 벗어 던져놓은 청바지에 뽀얀 막걸리 자국이 마치 벚꽃처럼 점점이 피어있었다. 그걸 보니 속이 메스꺼워졌으나 엄마의 매서운 눈총 앞에 메스꺼움 따위는 감히 존재감을 드러낼 여지가 없었다.
아 아! 그날의 길모퉁이 까페와, 그날의 술자리와, 그날의 흐린 전구 불빛 아래에 탐스럽게 유혹적이던 유백색의 액체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날을 시작으로 나는 형들과 자주 어울렸다. 형들의 친구들인 다른 복학생 형들과도 어울릴 기회가 많았고, 형들의 고등학교 동문 친구들도 기꺼이 나에게 합석을 허락해주었다. 나는 비로소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형들을 따라다녔고, 그해 가을에, 개설된 지 1년이 된 모 학과의 전국연합체육대회에 형들과 내 친구들과 함께 참가하였으며, 우승 축배 막걸리에 기분이 좋아진 인천의 지하철역 광장에서 다 같이 그 학과를 선택하기로 "주안결의"하였고, 이듬해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도 그 학과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40여 성상이 흐르고 있다.
물론 이 많은 이들의 역사가 1982년 5월의 길모퉁이 까페와 막걸리에서 비롯되어지지는 않았으리라. 모든 이의 인생과 세상은 매우 정치하고 오묘하므로. 그러나 마치 신화처럼, 마치 옛이야기처럼 "그때, 우리는 이렇게 시작되었지"라고 말문을 열어본들 누가 시비할 거리는 아닐 것이다. 어찌 됐든 나는 좋았으며, 나는 그랬으니까.
형들을 못 본 지 이미 십 년, 이십 년 혹은 삼십 년 가까이 되었다. 서로 바빴고, 뜻한 대로 인생길을 걷지 못한 사연도 있다. 어렴풋이 소식을 듣기도 하고 우연한 자리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세월의 간극은 깊고 넓은 것인가. 예전을 추억만 할 뿐 부지런을 떨며 수소문하거나 연락을 취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리운 형들, 아니 모두들. 잘 지내시기를, 과분하게도 그들에게 아주 작은 점처럼 만으로라도 추억될 수 있기를, 기억이 아닌.
사족을 달자면, 그해의 문리대 농구대회에서 우리 어문계열팀은 모두의, 아니 우리의, 예상을 깨고 1회전에서 탈락했다. 5반칙 퇴장의 규정도, 팀파울 규정도, 자유투도 적용되지 않는 무법의 '럭비 농구'는 '제도권 농구(?)'의 에이스가 승리를 견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날의 패배와 부상의 상처에 신음했던 비운의 에이스와 최ㅇㅇ형은 '노을을 보며 새벽을 다짐하고, 와신으로 스스로 경계하'며 훌륭한 동료들로 팀을 꾸리는 한편, 제도와 율령을 올바르게 세움으로써 다음 해와 그 다음 해에 대회 2연패의 금자탑을 소속학과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 시대의 영광을 기리고자 짐짓 올드한 문체로 서술하는 바이다.)
부록.
막걸리에 얽힌 친구 - 편의상 S라 하자 - 의 에피소드 하나. 진짜 친구의 이야기이다.
S는 요새 용어로 캠퍼스 커플의 '썸'을 타고 있었다. 그 친구의 '썸녀'는 술이 셌다. 고 한다. 어느 날 행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파전과 막걸리를 먹었다. 술자리가 2차, 3차로 이어져 밤이 깊었다. S는 술이 어지간히 올랐고 여자친구는 S보다 약간 더 취했다. 고 한다. 버스는 끊겼다. 순진한 어리보기였던 S는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하고 택시를 잡았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녀가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도 혼신의 힘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지금 결혼한 오빠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오빠가 보통 무서운 성정이 아니다, 이 시간에 이 상태로 집에 들어가면 새언니에게도 망신이고 오빠는 아마도 내 머리를 밀고 나를 시골로 쫓아 보낼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은 숙박업소를 이용하고 내일 오빠에게는 레포트 준비 때문이었다고 잘 둘러대어 싹싹 빌면 그것이 오히려 모두에게 평화를 주는 일일 것이다, 네가 나를 도와 숙소를 잡아 줘라, 그리고 낯선 곳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는 것은 순진하고 어린 나에게는 몹시 무서운 일이니 네가 곁에서 나를 지켜주면 고맙겠다 라고 했다. 고 한다.
S는 무슨무슨장이라는 붉은색 네온간판을 보고 그리로 그녀를 조심스레 부축하였다. 낮은 조명이 침대 머리맡을 밝혔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흩뜨린 채로 침대 한쪽 편에 모로 누워 새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그녀의 숨소리와 그녀에게서 나는 옅은 화장품 향기에 S는 살짝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고운 어깨선과 아담한 몸의 굴곡진 선이 가볍게 오르내렸다.
S는 숨쉬기가 힘들었다. 조금의 기척도 그녀의 잠을 방해할 것만 같았다. 난생처음인 이 공간과 단둘이 있는 이 상황에서 그녀가 깨기라도 한다면 어색하여 심장이 터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긴장이 극에 달해 온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어깨와 허리가 결렸지만 자세를 바꾸거나 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힘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취기는 점점 올라왔다. 잠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S는 불경한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혼잣말로 더러운 자식이라는 욕을 했다. 고 한다.
그때 그녀가 끄응하며 친구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헉! S는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S는 자신이 그녀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아챈 것만 같았다. S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한참을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가 S는 마음을 먹었다.
번쩍, 눈이 떠졌다. 어, 여기 어디지? 잠이 덜 깨 어리둥절하던 S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방. 낮은 조명이 깔려있었다. 커다란 침대 옆 맨바닥에 그는 몸을 한껏 웅크리고 누워있는 채였다. 파르릇 형광등이 켜지듯 그의 머릿속에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S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없었다.
조갈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깔개도 없이 잠들었던 온몸은 쑤시듯 결렸다. 불을 켜고 탁자 위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거울을 보니 가관이었다. 퉁퉁 부은 얼굴에 까치집을 지은 더벅머리. 남방셔츠는 구겨졌고 청바지에는 막걸리 흘린 자국이 뽀얬다.
탁자 위에 대학노트를 찢어 쓴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고 한다.
"너는 아주 용기가 있거나, 아니면 아주 바보로구나. 나는 용기있는 바보는 싫어. 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