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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Aug 07. 2023

초음기 2-中

初飮記이다. 결코 超淫氣 아니다.

   대학에 갔다. 

   1학년 초의 학교생활은 그저 밍밍했다. 학과가 아닌 계열로 입학했으므로 나이도 경험도 어슷비슷한 동기들만 있었다. 캠퍼스와 그곳에서의 생활과 대학생으로서의 생활이 다 서툴고 이질적이었다. 200명이 이름 순서에 따라 세 반으로 나뉘었다. 머리를 기르고, 합법적으로 술과 담배를 하고, 다방 커피와 팝송에 젖고, 스스로 공부할 것을 찾아 몰두하는(양심적으로 이것은 잘 모르겠다) 등 고등학생 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래도 교양과목 21학점을 듣는 1학년 1학기는 어떻게 보면 거기서 거기였다. 기대했던 동류의식이나 소속감 혹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나누는 설렘 같은 것들은 희박했다. 

   어울려 다니던 동기 대여섯 명과 가끔 학교 앞 먹자골목에서 소주를 마셨다. 어른인 척, 남자인 척하는 치기와 호기는 어설펐고 대화는 늘 뻔했다. 그저 쓴 소주나 멋도, 맛도 모른 채 마시는 것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써클 활동에 집중했고, 또 다른 부류는 동문회와 향우회로 쏠렸다. 나는 재수 시절부터 소속되어 있던 농구 써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문회에 두어 차례 나갔는데 헛웃음만 나오는 위계 놀이와 군기 잡기 꼴에 질려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같은 학교를 다른 시기에 다녔다는 공통점밖에 없는데 그런 조악한 행동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다니. 심약해서인지 외로움을 타는 성격이어선지 어디든 섞여 어울리면서 위안받고 싶은 나였지만 동문회에서 마주친 그런 '위안'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농구코트가 제일 편했다. 그곳에는 팀 선배와 친구와 후배들이 늘 있었고 몸뚱이의 순전한 움직임과 순수한 승부의 열정이 반짝거렸다.

 

   중간고사가 끝난 5월의 맑은 날이었다. 공강 시간에 코트에 갔다. 얼굴이 시커멓고 눈이 작은 도수높은 안경 아.저.씨와 얼굴도 몸도 둥글둥글, 웃음도 둥글둥글한 아.저.씨와 어울려 반코트 시합을 했다. 시커먼 안경은 백팔십 센티가량의 키에 힘과 리바운드가 좋고 수비에 파이팅이 넘쳤다. 둥글이는 그냥저냥, 투핸드 체스트슛을 구사했는데 난생처음 본 엄청난 포물선을 그리며 아주 드물게 하나씩 림을 통과했다. 그 뒤로 몇 번 마주쳤고 함께 농구했다. 

   어느 날 시커먼 안경이 농구코트로 나를 찾아왔다. 처음으로 통성명했다. 어문계열 C반의 최ㅇㅇ이라고 했다. 내가 내 소개를 하려 하자 그는 안다고 했다. B반의 이치혜씨죠. 나를 어떻게 알까 하는 궁금증은 곧 풀렸다. 

   "곧 문리과대학 체육대회가 열리는데 어문계열 대표로 농구에 나갑시다." 

   아하! 농구 좋아하면서 하긴 농구코트에서 나를 모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암! 체육대회가 열린다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곧이어 둥글이와 내 친구 심ㅇㅇ이 농구코트로 왔다. 농구대회에 함께 나가기로 했다며 인사를 청했다. 알고 보니 둘은 중ㅇ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오케이. 나머지 멤버는 더 찾아보기로 하고 우리는 반코트 한 게임을 한 뒤 마침내, 드디어, 운명적으로 그. 곳.에 갔다. 

 

   "길모퉁이 까페."

   학교 정문에서 조금 비켜 위치한 선술집이었다. 당시 예순을 훌쩍 넘긴 마음 따뜻한 노부부가 운영하였다. 언제부터 길모퉁이 까페라고 불리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건대 그때에 서울캠퍼스에 있던 문예창작과의 오래전 학생 중 하나가 프랑소와즈 사강의 작품 제목을 가져와 문학질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금이 간 유리창을 테이프로 붙인 키 낮은 여닫이문을 당겨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면 왼쪽의 연탄아궁이에 커다란 솥이 얹혀 있고 홍합탕이 사철 보글거렸다. 그 옆 아궁이에 오뎅 꼬치가 그득한 솥이 얹혔고 또 그 옆에서 작은 체구의 할머니사장님이 도마질하다가 선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곤 했다. 할아버지사장님은 괜스레 '또 왔냐?'고 타박을 하며 서빙에 바쁘고 우리는 알아서 구석의 빈자리를 찾아 앉는 것이었다. 

   낮은 천장이 무거운 홀 가운데에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나무 기둥이 있고 둥그런 철판이 덮인 선술집 테이블이 네 개인가 있었다. 바닥이 고르지 않아 수평을 맞추기 위해 늘 무엇인가를 괴어야 했다. 한쪽 구석에 작은 방이 있었는데 꾸역꾸역 예닐곱 명이 들어가 앉곤 했다. 홍합탕과 오뎅탕과 이런저런 안주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담배 연기에 엉겨 마치 옅은 안개처럼 천장 아래에 피어있었다. 

   손님은 대부분 단골 학생이었다. 아마도 몇백 년쯤 지나면 이 자리에서 패총이 발견될 거라고 이죽거리며 우리는 막걸리와 소주와 홍합을 먹었다. 주인 내외의 눈에 어지간히 마셨다고 진단받으면 더 이상 술을 청할 수 없었고 간혹 쫓겨나기도 하였다. 물론 다음날 또 가고. 

   이 집을 졸업 무렵까지 다녔다. 간혹 책이나 손목시계를 담보로 외상도 지며 꾸역꾸역 다녔다. 나의, 아니 아니다!, 내 친구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연애가 이 집의 오뎅탕과 홍합탕 국물에서 비롯되었고 청춘의 셀 수 없는 감상과 낭만과 비분강개와 호연지기가 천장에 옅은 안개처럼 서렸다. 

   어느 날 아침에 정문 앞을 지나는 중에 할아버지사장님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고, 풍을 맞았다, 당황한 할머니사장님을 도와 택시를 태워드렸다. 그 뒤로 두 분을 다시 본 적은 없고 사장님의 경과도 모르고 있다가 한동안 후에 가게는 철거되었다. 언제였는지 자세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니 이 또한 안타깝다.

 

   생애 첫 본격 막걸리 음주 비화, 서설이 길기도 하다. 

 

   투 비 컨티뉴드~


https://youtu.be/CbOeYbBe9Mk?si=i_NYV9trkAcXWX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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