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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Jul 31. 2023

초음기 2, 初飮記이다. 결코 超淫氣 아니다.

1. 고찰.  

   

  모든 기억은 왜곡된다지만 올해가 내 기억에 가장 비가 많은 7월이었다. 중순 경 일기예보를 보고 두 번 기가 막혔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 '올 거라면서 왜 안 와?' 

  날은 덥고 허공에 수분 입자가 둥둥 떠다니기라도 하는 듯 피부가 접히는 곳마다 끈적였다. 공기는 무거웠다. 배어나오는 땀은 그저 귀찮았다.    

  

  비 온다는데 막걸리 한 잔 해야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려, 근데 오늘은 안 돼. 알았어, 나중에 비 오시면 하자구. 조오치. 그런데 진짜 왜 비오면 막걸리에 전이 땡기나 몰라, 너도 그래? 나도 그렇기는 해, 간절한 정도는 아니고.     


  인터넷에 접속해 있던 중이었다. 전화를 끊고 내친 김에 초록색창을 검색했다. "비오는 날 전을 찾는 이유." 생각보다 질문과 답변이 많았는데 수긍이 가는 답변은 썩 눈에 띄지 않았다. 지식인이 다 그렇지 뭐. 

  대략 세 가지 정도의 답변으로 구분되었다.

  비 오는 소리와 전 부치는 소리가 비슷해서 비가 오면 전이 생각난다, 이 답변이 가장 많았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럼 맑은 날 부침개라도 지져 먹을라치면 비가 그리워져야 하나. 삼겹살을 굽든가 치킨집 주방 근처에라도 앉아 있으면 비가 그리워 몸살이 날지도 모른다.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묻고 역시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다른 아이가 지식인 연 대답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두 번째로 많은 답변은 대단히 과학적인 - 과학적이라는 단어에 대한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 느낌을 주었다(나는 문과다. 검증은 불가능하다). 비가 오면 대기의 밀도가 높아진다. 기름으로 조리하는 냄새가 한결 멀리 그리고 고소하게 퍼져나감으로써 후각과 미각을 자극한다는 류의 내용이었다. 일견 수긍. 하품 효과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코로나같은 전염성 질환은 비오는 날 각별히 주의해야 하나 하는 대단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고찰도 해보았다.

  가장 공감이 간 이론(씩이나)은 세뇌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산업화, 근대화 이전의 농경사회에서는 비가 오면 물꼬를 보는 등의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부농은 드물었고 대부분 어려운 살림이었다. 가난한 아버지는 이런 저런 집안일을 하다가 가난한 어머니가 뚝딱 해 내온 부침개와  참으로 먹으려고 받아놓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 제대로 된 끼니를 대신했으리라. 어르신들이 '탁배기 한 잔 했으면 그게 밥이지'하며 막걸리의 든든함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드물지 않다. 위의 친구도 막걸리 한 통과 두부면 끼니가 된다는 스타일이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에 의하면 우리들이 하루 세 끼를 먹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번철에 돼지기름을 둘러 따끈따끈하게 지져낸 고소한 부침개의 기름진 맛은 어린 아이들의 세포 속에, 기억 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재료야 별 것이 있었을까. 배추잎, 돌미나리, 쉰 김치, 부추같은 것들을 묽은 반죽에 개어 부쳤을 것이다.  해물이 듬뿍 들어간 파전이나 굴전, 육전 등의 고급스러운 전은 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감생심.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할아버지,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다. 비오는 날 부쳐먹던 소박한 부침개와 막걸리 한 잔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생활의 모습이었다. 비가 내리면 도시로 나온 그 아들, 그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은 잠시 일을 멈추고 포도에 어지러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자신의 몸 속에 새겨진 막걸리와 부침개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리고는 일상의 아무렇거나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떠올리고 전화를 하는 것이다.

    

2. 추억.   

  

  무애 선생의 초음(初飮)은 소년시절에 대취하여 2박3일을 생사의 기로에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분의 문재와 입심을 감안할 때 백퍼센트 믿어지지는 않는다. 아무튼 그에 견주어 중학교 때 외할머니께서 밥그릇 뚜껑에 따라 주셨던, 설탕이 섞인 막걸리 한 모금을 초음(初飮)이라 하기에는 너무 폼이 안 난다.  

  몇 차례 밝힌 바 있지만 나는 놀랍게도 스무 살 이전에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외할머니의 막걸리 반 뚜껑 말고는. 당연히 술맛 따위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술이 땡길리 없었으며, 고등학교 때까지 단정하고 바른 모범생의 자세만이 참된 청소년의 그것이라는 의지와 신념으로 충일되어 있었기에 학생의 신분으로 술, 담배, 여자를 탐한다는 것은 나와 우리 가족,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우리 나라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악의 단초요 물리쳐야 할 악행에 다름이 아니었다. 당연히 방과 후에 학교 앞 중국집 골방에서 소주와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빨아대는 나의 친구들은 나의 바른 자세와 태도와 정신으로 교화와 훈육을 시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물론 나는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그런 행동을 통해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개인의 신념과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들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놀랍도록 관용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므로, 교화와 훈육의 지도보다는 그 녀석들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자신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로부터 자신들의 미래를 그려나가도록 지켜보는 방법을 택하였다. 

  물론 그 녀석들 중의 대다수가 학교에서 침 좀 뱉고, 어깨에 '후까시'도 좀 주며 어지간한 일에는 대화라는 번거로움 보다 '완빤치'라는 즉각적이고 확실한 방법으로 '쇼부'를 치는 성향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로 하여금 주먹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때림으로써 범죄와 뉘우침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할 수는 없다는 나의 굳은 결심도 교화와 훈육을 삼갔던 아주 큰 이유이기도 하였다. 결코 주먹이 무섭거나 통증과 불의 앞에 나약한 나의 성정 때문이 아니며, 만의 하나라도 그런 증거가 드러난다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정계에서 은퇴할 것임을 맹세한다.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샜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막걸리 초음기를 써보련다.

(오늘은 밤이 깊으니 투 비 컨티뉴드 되시겠다.)


https://blog.naver.com/uhmmmm/222010060109

https://blog.naver.com/uhmmmm/222026283223

https://youtu.be/xJXCkV2JUQw?si=lfy81VrikBCOh9H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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