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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Sep 04. 2023

병어 초식기(初食記).

‘草食記(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있네)’ 아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스스로도 꿈이었나 싶지만, 나에게도 반 곱슬머리를 귀를 덮고 목선에 닿을 만큼 길러 오 대 오 앞가르마로 가지런하게 도끼빗질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입대하기 전까지 5년쯤이었다. 찰랑거리기까지에는 못 미쳤지만 수시로 뒷머리를 다섯 손가락으로 훑어 웨이브를 다듬으며 나름대로 ‘엄정한’ 오디션을 거쳐 학교 앞의 음악다방에 디제이로 입성했다. 두 군데 다방을 거쳐 꽤 오래 디제이를 했다.

   첫 다방은 학교 정문 앞 건물 2층에 있던 “다ㅇㅇ(혹시라도 개인 정보가 새 나갈까 싶어 숨긴다)”였다. 2학년 봄이었다. “다ㅇㅇ”의 창업주이자 '회장님'은 당시 예순을 넘긴 할머니였다. 성정이 꼿꼿하고 엄하였다. 다방에서 숙식을 하였으므로 잠자리며 음식이며 입성이 편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디 고운 얼굴에 워낙 깔끔하게 단장을 하여 학생들이 주 손님인 음악다방에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가끔 짙은 경상도 사투리로 옛날 잘나가던 이야기나 아들 자랑을 하면서 눈이 허공을 짚곤 했다.

   

   경상북도 모 군 출생이셨는데 그 아버지의 땅을 밟지 않고 그 군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친정이 만석꾼이었다. 그런 댁의 귀한 따님이 이웃 지역의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 서방님은 삼 형제의 맏이로서 그의 동생은 훗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모 그룹의 창업주가 되었다.

   옛날에는 있는 집안의 재주 많고 인물 좋은 맏이들은 거개가 천하의 한량이 되어야만 했던 모양이다. 회장님의 서방님도 예외가 아니어서 주색잡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독수공방 수 삼 년에 어찌어찌 삼 형제를 둔 회장님은 어느새 비어가는 곳간을 채우기 위해 친정집 신세도 곧잘 졌다고 했다. 무릇 천하의 한량들은 자신의 부러지되 눕지 않는 심지를 타고난 법. 짐작하셨겠지만 가세는 기울었고 끝내는 그룹 회장이 된 시동생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뒷이야기는 흔한 신파이다. 남편은 물려받은 재산과(다 탕진했지만) 만석꾼 처가의 도움과 그룹 회장이 된 동생의 지원으로 일평생 돈 쓰는데 대한 거리낌이나 가계에 대한 고민 따위는 없이 신선처럼 노닐었다. 어느날 회장님과 세 아들을 빈손으로 남기고 세상을 떴다. 회장님은 그룹 회장 시동생으로부터 작은 지원을 받아 일체의 연고도 없는 흑석동에서 다방을 내게 되었다.

   당신은 힘든 일을 해서라도 아들들을 책임지겠지만, 혹시라도 옛 인연의 누군가가 다방 주인인 자신을 알아보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악착같이 일했고 지독하게 아꼈다. 마침내 막내아들까지 대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1985년 초의 겨울 어느 날. 회장님이 내게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한 잔 사주시겠노라 했다. 가끔 영업을 마친 다방에서 회장님과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한 잔씩 마신 적은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외식이라니, 언감생심.

   지금의 빗물펌프장 자리에 있던 포장마차에 갔다. (그때는 주황색 포장마차의 불빛이 흑석동 곳곳에 길게 이어져 있었다.) 회장님은 병어회와 소주를 시켰다. 기본으로 나온 오뎅국을 안주로 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포장마차 주인아저씨는 소형 냉동고에서 땡땡 언, 손바닥보다 조금 큰 병어를 한 마리 꺼냈다. 필라멘트가 다 되어서겠지, 30촉 전구의 가라앉은 불빛 아래 은색으로 반짝이는 병어는 오뎅국물 통에 연신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해동되었다.

   옆자리 서너 명의 취한 아저씨들은 언성이 높았다. 우리 맞은편 구석 자리의 어린 연인들은 수줍고 정다웠다. 뽀얀 김이 포장마차 내부를 채워 가늘게 흔들리는 카바이트 불빛이 한결 아늑했다.     

   “이 군아.”(당시 나의 별칭이 무려 '이 군'이었다.)

   “네. 잘 먹겠습니다.”

   “그동안 고마웠다.”

   “네?”

   “인자 우리 막내도 취직을 하고 했으니 나도 그만두기로 했다. 이 군이 고생 많았다. 그동안 서운한 거 많았제?”

   막내아들은 재벌 회장 삼촌의 계열사에 취직했다. 낙하산이 아니었다. 그는 어찌나 바르고 악바리였는지 재학 중에 자격증을 열 몇 개를 딴 대단한 사람이었다. 회장님 말로는 제 아버지가 반면교사였다고 했다.

    

   묵묵히 소주를 마셨다. 회장님은 의외로 술을 잘 드셨다. 조금 있자니 병어가 회로 썰려  나왔다. 처음 먹는 병어는 삼 분의 이 정도밖에 해동이 되지 않아 속살이 샤베트를 씹는 듯 조금 버석거렸지만 기름기가 많아 고소했다. 참깨가 조금 뿌려진 병어 한 점을 집어 초장에 살짝 찍으니 안주로 그만이었다.

   “나 술 잘 먹는다. 몰랐제. 우리 신랑이 한창 밖으로 돌 때 그 긴 밤을 부아도 나고 걱정도 되고 견딜 수가 없지 않았겠나. 담가 놓은 술을 매일 한 잔씩, 두 잔씩 마셔야 잠이 오는기라. 포도주, 모과주, 더덕주, 뭐 가리는 거 없이. 그러다 보니 주량이 소주 두 병까지 늘었다. 내가 장사하느라 안 마셔서 그렇지 이 군 너희들 내한테 안 될끼다.”    

 

   “이제 내 할 일 다 했다. 그냥 어디 가서 조용히 둘이 살다 가면 된다.”

   눈물이 회장님의 마른 뺨 위를 ‘또르륵소리라도 내는 것처럼 흘러내렸다. 눈물은 카바이트 불빛에 잠깐 반짝였는데 갑자기 성문기본영어 명사편의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예문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의 슬픔은 빨리 휘발되는 것이다.    

 

   회장님의 세 아들 중에 장남이 제 아버지와 똑같았다. 그 역시 자신의 심지를 부러뜨리되 눕히지 않는 ‘대한의 한량’이었다. 돈 쓰는데 어려움을 몰랐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다. 해야만 했다. ‘참는다’ 라는 단어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집안이 아버지 때문에 쫄딱 망하기 전까지는. 회장님은 다방을 넘기고 손에 쥘 돈으로 몇 년 전 이혼하고 혼자 사는 장남과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얼마 후 개강을 코 앞에 둔 어느 날, 회장님은 다방을 넘기고 할머니의 모습으로 떠났다. 다방을 인수한 분은 회장님과 친구처럼 지내던 주방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된 회장님은 펑펑 눈물을 쏟으며 다방 내부를 몇 번이나 둘러보고 만져보다가 막내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떠나갔다.     

   인생무상.

   돌아가셨을 것이다. 가끔, 아주 가끔 친구와 옛날 이야기를 할 때면 회장님 기억이 난다. 그 밤의 포장마차가 떠오르고 눈물을 떨구던 회장님의 모습이 멀지 않다. 고마운 분이었다.   

 

   그날 밤, 손바닥보다 조금 컸던 냉동 병어는 얼마였을까? 에전에는 값싼 생선 축에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싸다. 손바닥만한 병어는 보기 힘들다. 아주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병어를 먹을 때가 있다. 접시만한 병어는 찜으로든 구이로든 회로든, 대단한 호사이다. 고소하고 진한 맛에 양념이 더해지면 술보다 안주가 먼저 없어지는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발생한다.     

   열심히 가시를 발라내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어쩌다 한 번, 정말 어쩌다 한 번 기억 속 저 끝에 작게 접혀있는 흑석동 포장마차의 병어 맛을 더듬어 본다.    마음을 다잡던 그날 밤, 할머니였던 회장님은 병어가 맛있었을까. 그 밤을 기억하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나는 미래의 어떤 날에 오늘을 기억하며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을까.     

   귀뚜라미가 운다.


https://youtu.be/ciBisqVQ6xc?si=Z4I_jUK1qW8kuS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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