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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Oct 27. 2023

歌痕-7.초청기(初聽記) - Invitation 아님.

Long Long Time (Linda Ronstadt,1970).

    이른 아침, S는 교회에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습관대로 라디오를 켰다. 매주 일요일 아침 교회로 향할 때마다 듣는 CBS 라디오의, 올드 팝송을 주로 틀어주는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다. 적당한 청량감과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로 날씨는 쾌청했고 노래는 좋았다. S는 조금 행복해졌다. 이런 하루가 있어서 한 주일을 버틴다고 생각했다.

  신호대기로 섰는데 청취자의 신청곡으로 Linda Ronstadt의 “Long Long Time.”이 흘러나왔다.     


Love will abide take things in stride

Sounds like good advice but there's no one at my side

And time washes clean love's wounds unseen

That's what someone told me but I don't know what it means

'Cause I've done everything I know to try and make you mine

And I think I'm gonna love you for a long long time  

  

    S는 조용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가물거리는 가사를 떠올리고, 그 곡에 깃든 기억을 더듬다 보니 어느새 집중했다. 뒤차가 경적을 울렸다. 룸미러 속의 딸이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1981년 5월의 어느 아침. S는 가방에 참고서와 도시락을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30분쯤 늦은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러 걷는데 중앙대 정문 앞 도로가 학생들로 빼곡했다. 그가 조금 늦게 나오기도 했지만, 대학교의 중간고사 기간이다 보니 학생들의 등교가 다른 때보다 일렀다. 다소 과장한다면 그 혼자 수백, 수천 명을 비집고 거슬러 가는 기분이었다. 가뜩이나 숫기가 없는 데다 ‘혼자’라는 기분까지 더해지니 5분이면 다다를 버스정류장이 S에게는 한없이 멀었다. 

    ‘그 일만 없었으면 나도 너희들과 같을 거라고. 내가 재수생인지 아닌지 알게 뭐냐.’

    남산 도서관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두 가지 생각만이 교차했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대기표를 받고 줄 서 기다릴 때도, 배정받은 자리에 앉았을 때도,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멍하니 남산공원을 내다볼 때도 똑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시간만 죽이다가 오전 10시도 채 되지 않아 도서관을 나섰다. 

    도서관 정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청바지에, 유행이 지난 아버지의 셔츠를 입고, 베이지색 아저씨 잠바를 입은 채 반곱슬머리가 부스스한 어린 청년이 서 있었다. 초중고 12년 학제의 틀을 벗어난 지 이제 겨우 서너 달밖에 지나지 않은, 집 이외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규모 있게 쓰는 데 익숙하지 않고, 이토록 맑은 햇빛이 나뭇잎 사이 사이로 어지럽게 흩어져 하얗고 노랗고 혹은 빨간 기운으로 부서지는 5월의 어느 아침의 무력감을 혼자서 감당하기는 서툴고 두려운 젊은 아이가...     


    S는 재수생이었다. 

    앞선 2월 중순, 대학교 신입생 등록의 마지막 날은 그의 가족들이 미국 하와이 이민을 위한 비자 인터뷰를 받는 날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몇 차례 사업 실패로 곤한 형편에 처해있던 가족에게 공교롭게도 같은 날의 등록금 50만 원은 현실적인 큰 부담이었다. 그는 선택했다. 비자는 발급될 것이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원하며 그 밤을 숨 한번 깊게 못 쉬고 뒤척이고 보냈다. 

    다음 날 미국대사관을 다녀온 그의 가족은 기진했다. 5년의 계획과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저녁에 외출한 아버지는 만취하여 귀가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고 자존심이 상했을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엄마와 자식들은 그제야 비로소 굳었던 어깨에서 힘을 풀 수 있었고 아버지는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 모두 서로의 마음속에 헝클어져 내팽개쳐진 낭패감과 슬픔과 분노를 알았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갔다.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재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지니 좀 더 나은 결과를 볼 것이라는 용기이거나 희망 사항이거나, 그 둘이 합쳐진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S의 재수 생활은 시작되었다. 

    2월 한 달 동안은 졸업식도 하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보냈다. 3월부터 혼자 남산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재수학원에 다닐까도 했지만,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감도 있었다. 우글대며 모여 있는 재수생 무리에도 섞이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나가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까지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늘 일찍 도서관에 도착했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입장권을 받아 지정된 자리에 앉으면 마치 홀로 떠 있는 작은 돌섬처럼 웅크린 채로 있었다. 자판기에서 입에 익숙하지 않은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고, 정기간행물실에서 신문과 잡지를 찬찬히 읽고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시간을 정해놓고 보다가, 점심 도시락을 먹고, 남산공원의 작은 동물원을 산책했다. 문학실과 인문과학실에서 한 두 시간쯤 책을 읽고 다시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 

    남산순환도로에 가로등이 켜지면 가방을 꾸려 남대문 시장까지 걸어 내려왔다. 집으로 일찍 들어가기는 싫었다. 걸어서 한강 다리를 건너다 노들섬 테니스장의 사람들을 한동안 바라본다거나, 남대문시장에서 종로까지 천천히 구경하고는 - 딱히 구경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걸었다 -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늦은 저녁을 먹고 천일 카세트 라디오의 볼륨을 죽여 FM 방송이나 자신이 방송에서 녹음한 노래들을 들으며 잡다한 책을 읽었다. 대학가요제와 그룹사운드의 낭만과 정열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 한참을 공상하거나 국립묘지까지 괜히 걸어갔다 왔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특별할 일이 없는 그런 날이 연속되며 스무 살이 봄을 지나 여름으로 이어졌다. 5월의 그날 전까지는.    

 

    그 초여름의 아침에, 남산은 싱그러웠다. 나뭇가지는 연녹색의 여린 잎으로 채워져 갔다. 바람은 신선했다. 그 초여름의 싱그러운 아침에, S는 남산길을 느릿느릿 걸어 내려와 집으로 갔다. 부모님과 누나는 출근을 했고 동생들은 학교에 갔다. 텅 빈 집에는 ‘아무것도 아닌’ S 혼자였다. 

    입은 옷 그대로, 가방도 풀지 않은 채 맨방바닥에 누웠다. 방문을 조금 열어두니 파란 하늘이 눈으로 밀려 들어왔다. 멍하니 하늘을, 구름을 쳐다보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선뜻한 느낌에 눈을 떴다. 카세트 라디오를 머리맡으로 끌어당겨 켰다. ‘두 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가 끝나가는 중이었다. 마지막 곡으로 Linda Ronstadt의 ‘Long long time’이 흘렀다. 마치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책가방 같은 물건이라도 된 듯이 빳빳하게 누워 노래를 들었다. 아니 노래가 귓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팝송을 집중하며 듣기는 처음이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눈꼬리에서 눈물이 귀 옆으로 흘러내렸다.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S의 재수 생활과 스무 살이 각성되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 접하는 무수한 팝송들이 무차별적으로 그를 에워쌌고, 벗해 주었다.


https://youtu.be/xQh47MiLQ4M?si=b6zUYbsxcam-Yyp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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