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고속도로에서 올려다 본 초저녁 달과 별이 좋았다. 초승달과 금성이겠지. 잠시 갓길에 차를 대고 스마트폰의 셔터를 눌렀다. 보기에는 좋았는데 사진은 영 그 감회를 받쳐주지 못한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한계이리라.
하늘을 보고 있자니 옛날 노래 몇 곡이 떠올라 유튜브를 뒤졌다. 차 안에서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노래마다 어린 옛날의 작은 기억들이 몽글몽글했다. 추억인지 기억인지 하는 것들은 현대 사회의 스마트하고 모던하며 스피디하고 냉철한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데에 언제나 별 도움이 안된다,
其 1. "월간 팝송, 들국화"
1986년. 농구 잘 하고 품성이 멋진 후배들이 자이안츠에 입단하였고 우리, 자칭 '백수'들 네댓은 충북순대에서 막걸릿잔을 기울이곤 했으며, 금관 형은 ‘월간팝송’ 광고부에 입사해서 열심히(?) 근무 중이던 해였다.
7월의 어느 토요일, 동국대학교 체육관에서 친선경기를 하기로 했다. 우리를 초청한 동국대의 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죄송하다. 오래되었다. 시합을 가기 전에 충무로의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으로 일정이 잡혔다.
제목은 "수렁에서 건진 내 딸 2".
무려, 자그마치 당대의 김혜수 주연! 배우들의 무대 인사가 있었고 초대권은 월간팝송 광고부의 이금관 사원이 제공하였다! 빰빠라~밤~
영화를 보고 동국대로 시합을 가기에는 시간이 빡빡했다. 그럼에도 금관 형이 초대한 거니 모두 잠깐 들렀다만 가자는 분위기였다.
초대권의 비밀은 거기에 있었다.
배우들이 무대 인사를 하기 전, 그러니까 영화 상영 전에 오프닝 축하 공연이 있었는데 그 밴드가 바로 완전체의 "들국화"였던 것이었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를 연주하는 동안 우리는 열광했고, 정신이 아득해졌으며, 들국화의 세 곡 공연이 끝나고 김혜수 배우가 무대에 등장할 때 일어나서 나왔다. 김혜수 씨, 미안했습니다.
그 뒤의 들국화야 뭐, 말해 뭐하겠는가. 그해 가을 공대 축제에 초청을 받아 왔고 나는 공대 학생회의 ‘빽’으로 무료 입장했다. 대학극장이 온통 뒤집어졌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들은 메시지였고, 들끓음이었고, 불꽃으로 환하게 타올랐다가 열망으로 일렁이는 잉걸불이 되었다가 윤회의 비밀을 품은 재가 되었다.
몇 년 전 “응답하라 88”이라는 드라마를 재방송으로 끊어보거나 인터넷으로 찔끔찔끔 보았다. OST로 깔리던 들국화 노래를 들으며 문득 그 토요일의 대한극장과, 또 금관 형을 생각했다. 그 오래 전의 기억이 아스라하다는, 그만큼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이다. 끝!
시합은 어떻게 되었냐고? 입 아프게 뭘 물어. 우리는 자이안츠라니까!
其 2. “거리에서”
1988년 그룹“동물원”의 1집 앨범이 나왔다. 불멸의 명반.
1988년 말.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이른바 언론고시의 꿈을 2년여 만에 꺾었다. 졸업 후 1년의 고시 재수를 포함해서였다. 총 20여 차례의 응시, 운 좋게 2차, 3차까지 가본 적도 있지만, 벽은 아득히 높았다. 내 꿈만을 내세울 수 없었다. 취업해야 했다.
공채 시험을 보고 1989년 봄 S그룹에 들어갔다. 한 달 동안의 연수원 생활과 계열사 배치 후의 OJT를 거쳐 이른바 담당자, 신입사원이 되었다. 경영대나 공대 출신이 아닌 ‘인문’ 나부랭이 전공자로서 공부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부지런히 했다. 치열했다. 숫자와는 도무지 궁합이 안 맞는 체질이지만 억지로 합방 해야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나니 어느새 경영계획이라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일 좀 한다’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칭찬은 야근도 춤추게 한다. 주 6일 근무이던 시절, 1년 통틀어 일주일쯤 쉬었다.
수습 딱지를 뗀 후의 월급이 51만 원쯤? 매월 그 삼분의 일가량의 야근수당이 나왔다. 1990년 여름, 대학 시절 음악다방 판돌이 알바 때부터의 숙원이던 ‘오디오’를 샀다. “롯데 파이오니어.” 까만 윤기가 흐르는 앰프와 믹서와 튜너와 카세트 데크가 고급스러운 유리장 안에서 정자세를 취했고, 그 머리 위에 턴테이블이 앉았다. 스피커의 출력은 무려 50와트. 첫 음반은 Giuseppe Verdi 의 “Nabucco.”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감동하며 스피커 앞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매일 바쁘고, 매월 달력에 2자로 시작되는 날짜가 펼쳐지는 월말이 되면 매출 관리와 수금 관리로 날이 새고 별이 졌다. 관리의 S그룹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S그룹의 사관학교라는 말도 허세가 아니었다. 재미있었으나 사는 재미는 별 게없었다. 나의 자랑스러운 롯데 파이오니어는 종일 ‘지금은 라디오 시대’로써 엄마의 벗이 되었다.
1991년 가을. 회식을 마치고 집에 가다가 “동물원”의 1집 앨범을 샀다. 집에 도착하니 늦은 밤. 앨범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기만 하고 쓰러져 잤다.
그래서였나.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씻고, 전날 밤 아무렇게나 벗어 둔 양복바지를 다려 입고, 와이셔츠를 꿰면서, 조심스레 턴테이블의 바늘을 LP 위에 얹었다. 넥타이를 목에 두르는데, 츠츠츠...바늘 긁히는 소리에 이어 기타와 바이올린, 그리고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 씩 켜’졌다. 넥타이가 잘 안 매져서 몇 번을 풀고 다시 매다가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갑자기 눈물이 흐르며 훌쩍였다. 엄마는 놀라서 문을 열고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 하다가 ‘밥 먹을래?’했고 나는 바람처럼 집을 빠져 나왔다. ‘옷깃을 세워 걸으며 웃음 지려 하여도’ 잘 되지 않았다. 담배를 폼나게 깊이 빨아들이고는 테헤란로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걸었다.
왜 울었을까? 모른다. 거창한 의미나 가을날의 센티멘털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가을 타기에는 too young, 너무 젊은 날이었다. 전날 회식으로 속이 쓰렸나 보다.
사족. 기자는 여전히 내게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다. 기회가 되면 작은 인터넷신문사를 꾸려 기자 활동을 해보고 싶다는 희망 사항이 존재한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옛날에 포기하기를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여럿이다.
급기야, 가장 최근에 놀라운 기사 – 기사라고 해도 될까 모르겠다 –를 보았다. 심지어 실명으로 바이라인을 올린, 흔하디흔한 인터넷신문사가 아닌 종합일간지 서울신문의 기사이다.
법무부 장관이 예술의전당을 깜짝 방문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고 나타난 그의 등장에 공연장이 술렁였고, 가까이에서 처음 보는 시민들의 사진 요청이 쏟아지는 등 한 장관은 연예인 못지않은 뜨거운 인기를 자랑했다.(중략)
공연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하기 전 공연장 곳곳에 작은 소동이 일었다. 한 장관을 본 관객들이 “한동훈 봤느냐”, “대박이다”라며 웅성댔기 때문이다.(중략)
공연이 모두 끝난 후 복도에 한 장관이 등장하면서 인파가 몰렸다. 평소 국회에서 의원들의 말을 토씨 하나 안 놓치고 적극적으로 상대하는 모습 그대로 한 장관은 시민들의 쇄도하는 사진 요청 멘트를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응대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분홍색 프로그램북을 손에 꼭 쥔 한 장관은 다양한 자세와 각도로 시민들의 사진에 담겼고 때로는 본인이 직접 휴대전화를 들고 셀피를 찍는 모습까지 보였다. 어떤 시민은 “조각 같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서울신문 류재민 기자)
정말 그만두기 잘했다.
其 3. ”안녕. 김태화“
십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김태화 정훈희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팬심이 짙게 발동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름다웠고 멋있었다.
나의 젊은 날부터 “안녕”의 비장한 퇴폐미와 “꽃밭에서”의 아름다운 그리움을 좋아했다. 마치 그림을 그려 보여주는 듯한 “안녕”의 선율과 이미지로 나는 애창곡 리스트를 굳건히 한다.
이 가을, 문제의 어제 저녁 고속도로 위에서 “안녕”이 나왔다. 그리고 나의 에스프리는 불타올랐다. 저주받을 계절이여, 가슴을 뚫어버릴 듯한 처참이여. 곡절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난데없는 허무와 마음을 불안하게 자극하는 초조가 굵은 세 겹 밧줄처럼 촘촘히 엮였다.
김태화 가수처럼 늙어도 멋있으려 했는데, 망했다, 이미,
이렇게 가을이라니.
https://youtu.be/8IRmcsVJMLA?si=Ua_mX6cUVQxWtl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