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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Dec 23. 2023

歌痕 9 – "항해자"(시와 그림. 2001)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https://youtu.be/sF6wGi6oh84?si=f3svZnbzjZsnH5Fo


   ‘역시 오는 게 아니었어.’ 나는 계속 후회했다. 

   ‘어떻게 이리도 모든 사람이 엄숙하고 경건한 얼굴을 할 수 있지?’ 이상하고 어색하고 불안하고 불편했다.

2층의 구석에 앉아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가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나만 다른 종의 개체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교회에 온다고 아침부터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나 몸에 밴 냄새가 풍길까 싶어 신경이 쓰였다. 덥지 않고 청명한 날임에도 자꾸 땀이 비죽비죽 났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목사님의 축도를 마지막으로 길고 긴 예배 시간이 끝났다. 사람들이 나가는 동안 나는 딸아이와 2층 구석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움직이면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2층 자리가 다 비워지고 나서 우리는 일어섰다. 딸이 1층에 대고 ‘할머니!’하고 불렀다. 그 소리에 엄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어쩐 일이냐?”

   엄마는 나와 딸을 번갈아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엄마 주위에 있던 할머님들도 ‘조 권사 아들이지?’, ‘어서 와요.’, ‘좋다. 엄마한테 효도했네.’ 등등 알은체를 했다. 뻘쭘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나는 엄마의 얼굴에 떠오르는 두 표정을 보았다. 하나는 그렇게도 교회에 나오라는 말을 안 듣던 내가 예고도 없이 교회에 온 것에 대한 반가움의 표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엄마 자신도 몰랐겠지만, ‘쟤 무슨 일이 있네.’하는 본능적인 걱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아니, 교회를, 그저 습관처럼, 다니기 시작했다. 

   

   2005년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초등학생 딸에게 ‘내일 교회 갈래?’라고 물었다. ‘할머니 교회?’, ‘응.’

   아내에게는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마흔이 넘도록 1년에 기껏 송구영신 예배나 가보았을까 말까 했던 나는 교회의 주일예배라는 것을 몰랐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시댁 식구가 모두 다니는 교회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면 수상하다. 아내가 대뜸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엄마가 하도 교회 좀 나오라고 하잖아. 그냥 한 번 가보려고.’

   기댈 곳이 필요했다. 외롭고 힘들었다. 내가 헝클어뜨리고 망쳐버린 내 삶 앞에 면목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리도 전지전능하시다니 그 영험하신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에는 염치도 용기도 없었다.     

   그렇게 그저 흔들리는 시계추처럼 일요일이면 딸과 함께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매번 문지방을 넘기가 가장 어려웠지만 딸이 좋아서 앞장섰기에 교회 출석은 이어졌다. 여전히 교회와 사람들은 어색했고 예배 시간에는 겉돌았다. 목사님의 설교는 내 나름의 설익은 논리적 반박 거리를 찾는 대상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마주치는 교인들과 세상 착한 척하며 인사를 나누는 일은 고역이어서 늘 2층 구석에서 가장 늦게 일어섰다.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교회 로비에서 교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인사했다. 나는 시계추였으므로 그분들과 악수를 나누는 등 이중인격자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때쯤인가부터 로비가 조용해질 때까지 예배당에 혼자 멍하니 남아 있기 시작했다. 

   

   그날도 예배당에 혼자 남아 있다가 무심히 성경책을 펼쳤다. 시간을 때울 심산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성경책을 읽게 되었다.

   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 1년 동안 이 교회에서 개설했던 “베델성서대학”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아들을 교회에 다니게 할 요량으로 소개한 강좌로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 저녁에 두 시간가량 진행되었다. 서양의 문학과 예술의 기반이 되는 기독교와 성경을 공부해 보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강의를 들었다. 덕분에 성경을 촘촘히 다 읽지는 못했지만 대강은 훑어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예배에는 출석하지 않았으니 당시 담임목사님께서 나 때문에 속을 많이 끓이셨을 것이다. 

   펼친 곳은 신약성경이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로 시작되는 지루한 책장을 훌쩍 넘겼더니 마태복음의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라는 붉은 글씨 소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Ian Gillan과 이종용이 부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타이틀곡이 생각나서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장 39절) 

    

   읽고 읽고 몇 차례인지도 모르게 또 읽었다. 읽다가 눈물이 났다. 숨을 죽여 흐느꼈다. 예배당에 아무도 없었지만 십자가 앞이라서 부끄러웠다. 초라하게 엎어진 채 우는 내가 부끄러웠다.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인간적인 욕망과 두려움을 털어놓고, 그리스도로서의 운명을 거룩하게 받는 예수님의 고통과 고뇌와 의지와 힘이 고스란히 마음에 새겨졌다. 원죄와 대속과 구원 등등의 거룩한 단어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예수께서 몸소 비탄하고 몸소 이겨내는 모습을 보이시며 ‘나도 너희와 같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마음에 위로가 찾아온 느낌이었다. 눈물이 멈추고 흐느낌이 그치니 갑자기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마치 영화처럼, 소설처럼 이 노래를 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의 기사분이 기독교 관련 방송국의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웅얼웅얼하는 설교 소리가 나오고 성경 구절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는 식의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저 흘려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팝송 혹은 발라드 가요 같은 느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디제이의 소개 멘트를 듣지 못해서 제목도 가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인 고음부의 멜로디와 가사가 귀에 박혔다.     

   ...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항해의 끝이 되시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합니다.     

   날 포기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

   내 삶의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     


   다시 눈물이 맺혔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항해자”라는 곡이었다. 다시 들었다. 몇 번을 들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괜히 마음이 놓였다.   


   https://youtu.be/EWw5N7QSlQE?si=Xp2gc62omK8Ekbg7


   그날 이후 그전보다 훨씬 집중하고 진심으로 교회에 나가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신앙심의 수준이라는 것이야 정말 보잘것없는 지경이었다. 세례 교육을 받고도 정작 세례받을 용기가 없어서 두 번이나 미루었고, 교회 생활과 성경에 대한 무지로 서투름이 많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제대로 된 기독교 신자가 맞아?’하는 질문을 품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계기로 예수님에 대한 마음은 뜨거워졌다.  

   

   요새도 가끔 이 노래를 듣는다. 신기하게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맺힌다.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카타르시스의 눈물도 아니다. 그저 맑게 맺힐 뿐이다. 

   코로나로 한창 교회에서의 예배가 힘들던 긴긴 시기가 있었다. 벌써 아득하다니... 예배당에 나올 수 있는 인원 제한 규정이 있어서 찬양대가 예배 시간에 찬양할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찬양대 대신 지휘자님이 독창을 했고, 그 후 교인들이 자원하여 돌아가면서 찬양했다. 2021년 부활절을 보내고 4월 말에 무슨 용기가 나서였는지 내가 이 곡을 독창하였다. 음정도 틀리고 가사도 놓치고 급기야 감정이 북받쳐 염소 소리를 내는 대참사를 빚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이는 엄중한 시기의 압박에 따른 긴장과, 나의 풍부한 감수성으로 인하여 본 실력의 17퍼센트밖에 발휘되지 못한 것이었다.  

    

가 아니다. 신앙인이 거짓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 용서하세요.    


좋은 노래를 망가뜨리는 가장 빠른 방법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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