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9월, 2학기, 교양 불어의 첫 수업이었다. 중앙도서관 3층의 복도 안쪽에 위치한 C 강의실. 폭이 좁고 길어서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 벽으로 장의자가 줄지어 놓였다. 오후 3시에 시작되는 7, 8교시 연강이었다. 한 학기를 보냈지만 아직도 새내기 티를 채 못 벗은 100여 명의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강의가 끝난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로 웅성거렸다.
강의실 뒷문이 열리고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진회색 목 폴라 스웨터 위에 짙은 크림색 바바리코트를 입고계셨다. 홀쭉한 몸매에 은테 안경, 귀를 덮을 정도의 길이인 머리카락은 거칠게 손으로 쓸어 넘겼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
왼손에 교재를 들고 칠판에 ‘朴ㅇㅇ’이라고 쓰신 교수님은 창가 맨 앞줄의 장의자 책상 위에 걸터앉으셨다. 교수님의 오른편에서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 초가을 오후의 햇살은 바바리코트 위에서 살짝 부서졌고, 교수님의 얼굴에 제법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교수님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강의를 시작하셨는데 바바리코트의 한쪽 깃이 안으로 접혀있었다.
이런 느낌. 모자는 빼고.
멋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들과 1학기 교양과목을 강의하시던 교수님들로부터는 느끼지 못했던, 내가 상상만 해오던 문학의 향기, 문약한 학자의 풍모가 내 눈앞에 있었다. 노스탤지어의 정수, 궁극의 솔리뛰드, 자유를 찾아 유랑하는 배가본드의 영혼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순간, 불문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인생이란 그렇게 즉흥적인 게 아니야’ 하며.
우리는 계열로 입학을 했기에 전공은 2학년 때 정하게 되어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영문과로 가기를 원하셨고 동기들의 대다수 역시 영문과를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국문과로 가서 신문기자를 해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고 기자라는 직업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불어불문학과가 독어독문학과, 일어일문학과와 더불어 개설된 지 1년밖에 안 된 신생 학과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나는 흔히 얘기하는 줄도 없고 빽도 없고 비빌 데 한 곳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종들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끈끈한 인간관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 이는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 같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신생 학과란 몇 미터 뒤에서 출발하는 백미터 달리기 트랙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교수님의 매력에 푹 빠진 채 첫 수업은 끝이 났고 불문과를 가볼까 하는 생각은 곧바로 잊혔다. 몇 주가 지나고 맞은 교양불어 시간. 강의가 끝나자 예닐곱 명의 불문과 선배들이 협조 광고에 대한 양해를 구하며 강의실로 들어왔다. 81학번이니 거의 나와 동갑이었고 그 중 몇몇은 학교 내외의 여러 가지 일로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협조 광고의 내용은 10월에 인하대학교에서 열리는 서울 경인 지역 불어불문학과 연합체육대회에 함께 참가 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정이 딱하기는 했다. 한 학년 정원이 36명에 불과한데다 남학생들 몇 명은 입대했으니 남아있는 인원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행사에 불참하면 그뿐이겠지만 신설 학과 구성원의 열의와 젊음은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우리 수강 학생 중에는 1학기에 있었던 문리과대학 체육대회에서 나와 함께 어문계열 대표로 여러 종목에 참가했던 동기들과 복학생 형들이 있었다. 불문과 선배들은 우리에게 낚싯대를 드리웠고 우리는 냉큼 물었다. 체육대회 후의 화끈한 뒤풀이와 미팅이라는 미끼를...
이십여 개 학교가 체육대회에 참가한 가운데 우리는 소수 정예로 압도했고 축구와 농구에서 우승을 했다(당연한 결과였다). 난생처음 가본 주안동의 먹자골목에서 통음하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지고 끈끈한 불어불문학과를 함께 만들어 보자는 혈기방장에 기꺼이 화답함으로써 국문과는 주요 인재를 손도 못 써보고 놓치고 말았다.
분위기에만 휩쓸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입학 후 처음으로, 아니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쳐도 처음으로 학교 선후배라는 관계의 낯선 친밀함을 접했다. 각자의 희망 사항이나 욕망은 모두 달랐지만, 그것들과는 별개로 온 구성원이 함께 바라보고 가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닿았다. 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2학년부터의 학과 생활을 행복하게 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리도 감상적인 인생이라니...
꿈은 신문기자에서 파리 특파원으로 좌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꿈인 것이다.
https://youtu.be/QFcsQItMAAk?si=nna7GRHG5TUEbhQW
Pour toutes ces raisons Je t'aime(Enrico Macias.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