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커튼콜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간밤에 철 지난 눈이 꽤나 내려서 앞집 지붕이 하얗게 빛났다. 기와골을 가로질러 고양이 발자국이 길게 지나갔는데 햇살의 애무를 받아선지 밟힌 자국이 그닥 날카롭지는 않았다. 점점이 찍힌 자리에 작은 음영이 생겨 발자국 주위의 눈은 더욱 하얗게 도드라졌다. 개강은 했지만 아직은 어수선한 학기 초의 일요일 늦은 아침이었다.
마당 수돗가에서 헛둘헛둘 어깨를 풀고 무릎을 쪼그렸다 폈다하며 잠자리의 나른한 흔적을 털어낸 후 옹색한 포즈로 마루에 걸터앉아 모닝 시가레트를 물었다. 집에 아무도 없기에 가능한, 소소한 어른 흉내.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치혜냐? 나다 S.
응, 그래 왠일?
집이냐?
이런 븅~ 집에 전화해 놓고 집이냐니, 제정신이냐?
픜픜픜 맞다 씨바, 집에다 했지. 암튼 너 우리집으로 와라.
응? 거긴 왜?
어제 B새끼랑 우리집에서 술 졸라 먹고 잤는데 아침에 보니 눈이 엄청 쌓였네.
그래서?
해장술이 땡기는데 우리 둘 다 거지다 씨바. 그러니까 와서 술 좀 사라.
어쩌냐. 나도 거진데.
얼마 있는데?
몰라. 한 3천원?
그거라도 갖고 와. 우리랑 다 합치면 5천원 쯤 되네. 그걸로 삼청공원 가면 되겠다.
근데 왜 삼청공원? 나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거기 경치 좋거든. 낮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거기서 소주 먹고, 눈 구경하고, 노래도 부르고 하면 분위기 완전 산다.
무슨 공원에 낮에 사람이 없겠냐?
무식한 놈. 삼청공원은 다 밤에 쌍쌍이 가는데야. 낮에는 한산하고. 암튼 빨리 와라.
어어어.. 알았다. 근데 니네 무슨 일 있었냐?
아 몰라 씨바. 와서 얘기해.
삼청공원 횡보 동상. 구글에서 퍼옴.
느리적 느리적 이불과 요를 개켜놓고, 대충 청소를 하고, 머리감고 세수하고, 시내 나가는 거니 몇 벌 없는 옷 중에서 그중 나은 거 하나 골라 입고, 빗질 50번 하고, 요리조리 거울을 보는데 버릇처럼 틀어놓은 텔레비젼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 나왔다.
honey, you're my shining star
don't you go away, baby
wanna be right here where you are
until my dying day, yeah baby
Manhattans 의 "Shining Star."
브라운관(이 올드한 표현, 옛날 사람..)을 들여다 보니 '쇼2000'인가의 재방송이었는데 무려 '맨햍은스'가, 그 4명의 R&B팀이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을 한 것이었다. 만나면 좋은 친구 엠비씨 문화방송의 초청으로. 와우!!!! 흑백화면 속에(1980년 겨울에 컬러티브이 방송이 시작되었지만 우리집은 아직 흑백티브이였다. 나중에 들여놓은 삼성전자의 칼라 이코노TV를 알현했을 때의 감동은 잊히지 않는다!)
흰색 정장을 세트로 입은 그들이 칼군무-라 하기에는 참 거시기 하긴 하다마는 손을 들었다 내렸다, 엉덩이를 씰룩 거리다가 우아하게 턴~ 등 단체 율동이 가미되어 있었다- 와 함께 특유의 미성과 하모니를 발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칼라 이코노TV. 구글에서 퍼옴.
멋있다. 너무 멋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가야 한다. 노래는 끝났다. 나는 채비를 마치고 TV를 끄려 하는데
This has got to be the saddest day in my life
익숙한 베이스 인트로와 함께 깊고 굵은 목소리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I~~had to meet you here today
There's just so many things to say...
"Kiss and Say Goobye."
TV앞에 박힌 듯 서서 끝까지, 아마 눈도 안 깜빡였던 것 같다, 약간의 과장을 아주 조금 보태자면, 응시하였다. 마지막에 그들이 손을 흔들며 퇴장할 때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까지는 아니고 눈이 촉촉해졌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눈 내린 다음 날, 스물 한살의 보잘것 없는 남자애한테 평소 좋아했던 노래가 맞닥뜨려진 것인데, 그 가수들이 그 남자애와 같은 서울 하늘의 공기를 들이 마셨으며, 그 사실이 사뭇 양자론적인 효과를 불러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래의 울림이 여느 때보다 크고 깊었고, 그래서 별별 생각이 다 떠올라서 였을까? 어찌된 일이든 상관없다.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길음동에서 내릴 때까지 계속 나는 키스 앤 세이 굿바이를 입속으로 흥얼거리거나 허밍하였다.
S와 B를 만났다. 셋의 주머니를 버스비를 빼고 탈탈 터니 4천 몇 백원쯤 되었나 보았다. 두꺼비 몇 병과 삼양라면과 새우깡, 쥐포를 사고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은하수'와 '한산도'를 한 갑씩 챙겼다. S의 말마따나 흰눈이 소복한 삼청공원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 움이 돋지 않아 거친 겨울나무들로 가득찬 공원 산책로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신문지를 깔고 술과 안주를 벌여놓고 한 잔씩을 털어 넣었다. 3월이지만 눈내린 산속의 공원은 추웠다. 연거푸 몇 잔씩을 마시고 나자 S가 기타를 잡았다.
I~~had to meet you here today
There's just so many things to say...
응? 뭐지? 이 우연의 일치는?
우연이 아니었다. 녀석들도 나를 기다리는 동안 그 재방송 프로그램을 보았고, 키스 앤 세이 굿바이 연주를 본 것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감동이 뻑적지근하게 정수리부터 발꿈치까지 관통을 한 것이었고.
노래를 몇 곡 더 부르고, 몇 잔을 더 마시고 나서,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뭇 아름다웠던 연애의 날들과 사뭇 끓어올랐던 갈등의 시간들과 사뭇 비감했던 이별의 순간에 대하여. 우리는 함께 감탄했고 함께 비분강개 비난했고 함께 절절히 가슴 아팠다.
그리고 누가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울었다. 대성통곡은 아니고, 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우아하게 훌쩍였다, 라고 우리는 생각했지만 드물게 공원에 산책을 왔던 어른들이나 공원 관리인 아저씨라면 분명 혀를 끌끌차며 분노했으리라. 요새 젊은 것들이란 쯧쯧...
그럼에도 하얀 눈밭 벤치에 투명한 술병과, 주황색 삼양라면 봉투를 뜯어 펼친 은색 비닐 위에 잘게 부수어 흩뜨린 생라면과, 그 위에 솔솔 뿌려진 진갈색의 수프 가루, 길이로 찢어놓은 쥐포 따위로 우리는 제법 희희낙락했고 훌륭히 감성적인 설야주연(雪野酒宴)을 만끽하였다. 심히 추워 옹송거린 어깨로 하산(?)했을 때에는 그 귀한 주흥이 다 사라지고 말똥말똥한 늦은 오후를 맞아야 했다는 것이 가슴 아프긴 했지만 말이다.
헤어진 연애담을 풀 때는 보통 친구의 이름을 빌어 이야기를 엮는다. 그날 삼청공원의 연애담도 그러하였는지, 나의 이야기였는지는 확인할 바 없다. 그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