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날이, 그리고 저도 모르는 새 잃어버린 날이 하루쯤 있는 법이다.
1986년. 9월치고는 꽤나 쌀쌀한 저녁이었다. 학기 초의 금요일이다 보니 ‘大 무슨 무슨 高 동문회’들로 먹자골목에는 흥이 넘쳤고 그렇다 해도 다방은 이상하리만치 한산했다. 이런 날은 보통 두 가지 경우. 열 시에 맞춰 끝내거나, 뒤늦은 취객들로 거의 열한 시 가까이 구시렁대며 자리를 지키거나. (우리 아르바이트생들의 친구와 선배, 후배들도 취중에만 발현되는 의리를 앞세워 늦은 시간에 많이들 오곤 했다.) 오늘은 후자일 것 같은 느낌. 신청곡도 없겠다, 커피와 담배의 시간. 턴테이블에 ‘Ocean Gypsi’를 걸어 놓고 커피를 타러 갔다. 주방의 TV에서는 1년 앞으로 다가온 86아시안게임의 이모저모를 집중 보도하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K 아저씨는 어디 가셨어?” 서빙 알바 중의 맏이인 H가 담뱃불을 붙이는 내게 물었다.
“어디긴. 비둘기 바라다 주러 갔지.”
“흐이구. 도대체 왜 그런대? 아니, 척 보면 걔가 아저씨 갖고 노는 거 모르나? 걔가 뭐가 좋다고… 우리는 걔 여우 짓 하는 거 보면 코웃음밖에 안 나오는데. 어떤 때는 한 대 쥐어박고 싶다니까요.”
“냅둬유. 사랑한다잖아. K형은 진심인 것 같은데 그러다 미운털 박히지 말고. 그나저나 H 씨도 성질 좀 죽이시라고. 그렇게 터프하니까 형이 무서워하잖아요.”
“무섭긴 무슨. 이따가 아저씨한테 일찍 끝내고 소주 한잔하자고 해요.”
“그럽시다. 근데 오늘은 그렇게 안 될 것 같은데. 늦게 한 팀 올 거 같지 않아요?”
담배를 끄고 음악실로 들어갔다. 이 다방에 온 지 2년이 넘었다. 입대 영장은 자꾸 늦춰져서 휴학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아르바이트생 중에 제일 고참 급이 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오지랖이 넓어졌다. 주위에 왠 사연들이 그리도 많은지 다방이 끝난 늦은 밤마다 쥐포 안주를 씹어야 했고 입대 환송회와 휴가병들도 줄을 이었다.
넉 달 전 어느 날이었다.
다방의 매니저인 K형이 마치고 소주 한잔하자고 했다. 으레 그런 자리라 여기고 4홉들이 진로 한 병과 쥐포를 챙겨 마주 앉았다. 시답잖은 얘기로 왠지 어색한 몇 잔을 나누자 형이 불쑥 얘기를 던졌다.
“치혜야. 편지 한 통 써 도.”
“예? 무슨 편지요? 동생 위문편지?”
“M한테. 생일이라 편지 한 통 써주고 싶은데 내가 그런 재주가 없다 아이가.”
“형. 그럼 연애편지...? 농담 아니었어요?”
“농담아이다. 보면 볼수록 좋은 애다. 진지하게 사귀어 볼라꼬.”
“형. 걔 이제 1학년이고 형이랑 띠동갑이에요. 걔 친구들이랑 다닐 때 보면 사귀는 애도 있는 것 같던데. 걔도 형 좋대요?”
“걔 걔 하지 마라. 니 형수 되면 우짤라꼬? 가 말하는 기가? 가는 그냥 동창이라카대.”
안경렌즈 너머 형 눈이 깊어지는가 싶었다.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는 마치 두 주먹을 불끈 쥔 투사처럼 말했다.
“이 참에 쇼부 볼라고. 나 좋아하는 느낌은 알겠고, 정식으로 얘기하면 될끼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말해 줄 테니 니가 함 잘 써 도!”
그 밤이 얼마나 길었던가. 졸리지만 졸린 티를 낼 수 없었고 결코 공감할 수 없지만 공감(한 척)해야만 했던 그 밤. 그녀가 왜 ‘하얀 비둘기’로 칭해지게 되었으며 그녀의 두 눈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지 알아야 했다. 그녀가 떡볶이를 오뎅 국물에 씻어 먹어야 하는 비밀과(매운 것을 못 먹는다!) 어린 나이지만 어찌나 술을 예쁘게 마시는지 그 홍조 띤 볼마저(벌게진 얼굴) 몸서리쳐지도록 사랑스럽다(글쎄다?)는 고백에 감탄해야 했다.
둘이 나눈 사소한 이야기와 몸짓을 통하여 그녀의 속마음을 묻고, 가늠하고 그러다 부정하고 다시 확신에 차서 들뜨는 형의 이야기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누군가의 달콤한 연애 이야기는 많은 경우 마주앉은 사람에게 지루한 신파의 드라마일 뿐. 연신 하품을 해대고 나서야 드라마는 끝이 났다.
그 며칠 후에 기름기 좔좔 흐를 정도로 느끼한 편지를 써서 건넸다. 물론 형의 요구에 의한 몇 차례의 고쳐쓰기는 필수였다. ‘호수 같은 너의 눈동자’라거나 ‘긴 밤을 하얗게 불태웠다’, ‘운명의 여신에게 감사한다’같은 ‘진솔한’ 형의 마음을 담아서.
그 고백이 주효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K형은 그 뒤로도 그야말로 극진하게 비둘기 양을 챙겼다. 그녀는 알바 시간에 조금씩 늦게 도착해서 남들보다 많이 일찍 끝났다. 손님이 들어오면 알바생들 중 가장 끝 순번으로 주문을 받으러 갔고 대부분의 경우 1번 테이블(알바생들이 주로 앉아 있던 자리였다)에서 비둘기 같은 미소(K형의 표현이다. 비둘기가 어떤 모습으로 웃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를 지으며 앉아 있고는 했다. 그녀의 알바 시간이 끝나면 형은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 신고 음악실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치혜야. 카운터 좀 봐 줘라.”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이야기를 남기고 형은 비둘기 양과 다방 문을 나서는 것이었다. 보통은 30여 분, 좀 길면 한 시간가량의 배웅 겸 데이트가 진행될 동안 나머지 알바생들은 연신 비둘기 성토에 열을 올리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썩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고 나도 내심 그녀가 탐탁지 않았지만 남의 연애에 신경 쓸 필요가 무엇이랴. 잘 된다면 가족과 떨어져 노총각으로 홀로 지내는 K형에게는 좋을 일이었다.
‘오늘은 데이트가 좀 길군.’ 아홉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거칠게 문을 밀치며 K형이 들어왔다. 훅 풍기는 술 냄새. 1번 테이블에 털썩 몸을 던진 형이 담배를 빼 물었다.
‘뭐지? 영업시간에는 술 안 하는 양반이... 피우지도 않는 담배는 또 뭐야’
손님 네댓 명이 들어왔다.
“오늘 영업 마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벌떡 일어서며 외치듯 말을 마친 형은 마포걸레를 갖고 나와서 홀을 닦기 시작했다. 우리들도 형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정리를 했다.
“H 씨. 오늘 소주는 안 되겠네요. 형 무슨 일이 있나 봐요. 먼저 나가세요.”
알바생들을 모두 보내고 홀 조명을 껐다. 10시도 채 안 된 시간.
“형.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침묵.
“옷 챙겨라. 술 한잔하러 가자.”
우리는 영등포역 건너편에 있는 포장마차에 마주 앉았다. 세 번째의 소주 병뚜껑을 따는 동안 형은 별말이 없었다. 나도 몇 차례 너스레를 떨어보다가 어쩐지 무람 해져 잠자코 잔을 비웠다. 거의 손을 안 댄 곰장어 구이는 이미 식어 버렸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검붉은 덩어리는 더 이상 식욕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 위에 뿌려진 통깨들만 낮은 촉수의 전등 빛에 이상하리만큼 반들거리는 윤기를 내고 있었다.
“나 같다. 그자?” 형이 곰장어 토막들을 젓가락으로 툭툭 굴리며 말했다.
“때를 놓치니까 다 식어서 보잘것없고 쓸모도 없고... 그냥 버릴 일만 남았다 아이가.”
후~ 한숨과 함께 형은 소주 한 잔을 원 샷 했다.
“내가 싫단다. 자꾸 따라다니고 말 걸고 눈치 보이게 시리 지 옆에서 알짱거리는 게 부담스럽단다.”
콜콜콜... 빈 잔을 채워줬다.
“내일부터 안 나온다 카대.”
다시 원샷.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니 알바는 계속해달라고 했더만 남자친구가 싫어한다고...”
형 말끝이 흐려졌다.
“이런 나쁜 것이 있나. 아니. 남자친구 없다면서요? 어린 게 벌써부터 양다리 걸치고 여우짓을 해! 그래서요, 형?”
“그래서는 무슨... 알았다고 했지. 사랑하니까 보내주겠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남자는 남자가 알아보고 여자 속은 여자들이 꿰뚫는다더니 알바생들이 쑥덕거리던 얘기가 맞았다.
“염병하네. 사랑은 무슨. 걔가 형 갖고 논 거네. 형 호의와 애정을 이용해 먹은 거라고요.”
“걔 욕하지 마라. 걔도 얼마나 힘들었겠니? 나를 좋아했던 것은 맞는데 주위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을 거야. 나이 차이도 있고, 내가 무슨 번듯한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키도 작고... 나 정 떼려고 남자친구라고 한 걸 거고. 내가 오히려 미안할 뿐이지. 나를 좋아해 준 것만도 고맙지.”
형은 다시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실연은 실연이고 형이 술을 이렇게 마시는 것은 불안했다. 주량이 그리 세지 않은데 상한 속에 들어가는 술은 더 독해지니까.
“알았어 형. 이제 가자. 사랑해서 보내기로 했으면 깨끗이 잊어요. 솔직히 그렇게는 잘 안되겠지만 그래도 폼 나게 의연한 척하다 보면 아물 겁니다. 자, 가요.”
“알았다. 한 병만 더 하고 가자. 아줌마!”
우리는 말없이 소주를 나눠 마셨다. 형은 담배를 물었다가, 눈물을 훔치다가 하면서 한껏 얼굴을 찡그리며 잔을 비웠다. 갑자기 형이 욕을 뱉었다.
“걔가 나쁜 거 맞지? 뭐? 부담스럽고 싫다고? 그런데 그동안 왜 그렇게 나한테 잘했어? XXX. 기분 정말 개 같네, 에이 퉤!”
잔을 꽉 쥐고 몸을 떨면서 형이 외쳤다.
“에이, 더러운 X"
형은 아랫입술을 물고 끄윽끄윽거리며 울었다.
요 며칠 동안 M이 조금 냉정했단다. 알바 끝나고 갈 때도 유난히 거리를 두고 걸었고 어제와 그제는 혼자 가겠노라고 해서 서운했지만 그러라고 했다. 오늘도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고 ‘하지 말아야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에 휘둘려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갔다고 했다.
형과 그녀가 몇 차례 함께 갔던 경양식집에서 ‘그냥 동창’인 친구를 만나는 그녀를 보고 ‘아니겠지’ 했고,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는 그들을 몰래 지켜보며 ‘설마’ 했고, 입맞춤하는 장면 앞에서는 무릎 아래에 힘이 주욱 빠져나가며 아연실색, ‘괜히 왔다’ 후회막급이었단다. 오늘 형에게 밀어닥친 격랑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머리를 바쁘게 돌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나도 같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남녀상열지사는 양쪽의 이야기가 합쳐질 때 비로소 아귀가 맞는 것이고(그럼에도 M의 잘못이다. 못된 것!) 혹시라도 둘의 관계가 호전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낭패. 작년에 동기인 P가 휴가 나왔을 때 고무신 바꿔 신은 녀석의 여자 친구 얘기로 통음하며 밤새워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럴 바엔 헤어지라고, 헤어지겠노라고 비장한 다짐을 했는데 그다음다음 날엔가 그 둘이 팔짱 끼고 다방에 들어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연애질이란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조변석개하는 남녀의 연심을 헤아릴 길이 없으니 그저 지켜볼밖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형을 바라보며,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려주며 몇 잔을 더 비웠다. 평소보다 많이 마셨는데 취기는 오르지 않았다. 형이 걱정되기도 했고 둘이 마실 때 한 사람은 정신줄을 놓지 않는다는 술자리의 불문율이 작동된 것이기도 했으리라. 비틀거리는 형을 추슬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두 시가 가까운 시간. 나오니 바람은 선뜻했고 택시를 잡거나 합승이라도 하려는 사람들로 도로는 북새통이었다. 금요일 밤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다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등포역 쪽으로 길을 건넜다. 우리도 몇 번이나 손을 들었으나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할증이 붙는 열두 시가 지나고도 꽤나 있어야 할 모양이었다.
“치혜야. 가자.”
“네. 형. 그런데 보다시피 택시 잡는 게 장난이 아니네요. 휴.”
“아니. 집에 말고. 가자고!”
팔짱을 끼고 부축하던 내 손을 풀고 형이 갑자기 뒤돌아서 빠른 걸음을 내디뎠다.
“형. 그쪽 아니에요.”
형 어깨에서 흘러내린 점퍼를 주워 들고 뒤따라가는데 형이 어떤 아주머니랄까, 할머니랄까, 한 여자분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분위기가 이상했다. 짧게 몇 마디를 나눈 형은 ‘누구지?’ 하며 뻘쭘하게 서 있는 내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누구예요? 어디 가려고?” 말하며 형의 어깨너머를 보니 침침한 백열 방범등 불빛 속으로 리어카 한 대를 비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들이 잇닿아 있었다.
“가자. 아가씨가 예쁘고 잘해 준다 카네.”
맙소사! 말로만 듣던 몸 파는 골목? 저 아주머니인지 할머니인지가 포주? 우리가 오늘 여기를? 겁이 덜컥 났다.
“형. 오늘 이거는 아닌 거 같아요. 형 기분 울적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홧김에 이건 아니지. 갑시다. 가요.”
“아이다. 내가 그래서 그라는 거 아이다. 복수심, 자포자기 그딴 거 아이다. 나도 남자 아이가. 나도 욕망이 있다 아이가. 분출해야지. 서른 넘은 총각이 합법적으로 욕구를 해소하려는데 누가 뭐라 카노. 가자.”
“형. 이건 진짜 아니에요. 형 오늘 좀 취해서 그러는 거예요. 내일 되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요.”
마음을 돌려볼까 해서 속에 없는 이야기도 했다.
“아니. 막말로 M이랑 다시 잘 됐는데 걔가 이거 알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냥 갑시다. 네?”
형이 눈을 부라렸다.
“너 내 앞에서 한 번 더 그 X 얘기하면 죽을지 알아라. 그리고 오늘 무조건 여기 간다. 따라와! 안 오면 나 너 안 본다.”
형은 내 팔을 잡아끌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앞에서 그 아주머니인지 할머니인지가 “그래 빨리 와요. 잘 해줄게.”라며 우리를 채근하고 서 있었다. 우리 뒤에는 어느 틈에 어디서들 나왔는지 흰색 쫄티에 배바지를 받쳐 입은 덩치 두 명이 “자. 자. 빨리 들어가세요.” 존댓말인데 전혀 존대로 들리지 않는 말로 우리를 앞으로 밀어냈다. “어, 어.” 하다 보니 어느 결에 우리는 어둠 속에 가라앉은 듯한 마당 가운데 섰다.
여관 또는 여인숙으로 오랫동안 사용됐을 법한 슬레이트 지붕의 낡아 보이는 집. 마당을 빙 둘러 짙은 황토색의 하나 짜리 나무 문짝이 달린 방들이 잇대어 붙어있었다. 문짝의 윗부분에 달린 책받침만 한 우윳빛 반투명 유리창마다 연분홍색 불빛이 비쳐 나왔다. 우리는 그중 불이 켜지지 않은 채 나란히 붙어있는 방으로 하나씩 나뉘어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졌다.
“신발은 그 봉투에 담아서 방에 들여놔요. 없어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피크타임이라 좀 기다려야 돼. 편히 누워서 기다리세요. 아유, 오늘 같은 날 우리 집 온 건 진짜 행운이셔....”
그 아주머니인지 할머니인지가 너스레를 떨고 문을 닫았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피크타임이라니. 이 무슨 더러운 얘긴가.
앉아 있을 수조차 없어서 안절부절하며 그제야 방 안을 둘러보았다. 붉은색 셀로판지를 갓에 붙인 형광등 하나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창밖으로 배어 나오던 연분홍색의 광원이리라. 과하게 벌거벗은 채 과하게 가슴을 강조하고 선 외국 여성의 사진이 과하게 클로즈업 된, 방에 비해 과하게 커다란 오비맥주의 달력이 벽에 걸려 있었다. 한 평 반쯤 될까? 좁은 방 한구석에 서있는 자글자글한 꽃무늬 프린트의 비키니 옷장과 방바닥에 펼쳐진 큰 꽃무늬의 요와 이불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베개 맡에는 주전자와 컵, 그리고 요구르트가 놓여 있었다. 입안은 바짝 말랐지만 왠지 손을 대면 안 될 것 같았다. 더럽다는 느낌보다는 그것들에 손을 대거나 마시면 어딘지 모를 헤어날 수 없는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 같다는 불길함이 확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향기가 아니고 냄새였다. 코가 심하게 막히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 머릿속에서는 오래된 소설들에 나왔던 ‘싸구려 분내’라는 단어가 맴을 돌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릴없이 방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했다. ‘선데이 서울’ 같은 주간지나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나 ‘꼬방동네 사람들’ 등의 소설에서 많이 접한 상황이지만 소설과 현실은 달랐다.
‘좀 더 강하게 제지할걸.’하는 자책과 수치심이 뒤엉켰다. 흰색 쫄티의 덩치들 기세에 졸아붙었던 것에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칼부림, 비뇨기과, 성병, 양아치, 쪽팔림 등의 단어가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이것들은 무서움의 이복동생들이었다.
‘어떡할까?’ 골똘해 있었다. 삼십 분쯤 지난 것 같아 시계를 보니 불과 오 분이 조금 더 지났을 뿐이었다. 입안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입술은 말라붙었다. 비로소 K형이 들어간 옆방에서도 왔다 갔다 하는 인기척이 나는 것을 알아챘다. ‘형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기다리기에 마음이 급해서?’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벽을 콩콩콩 두드리며 작은 소리로 형을 불렀다.
“형! 형! 뭐해요?”
인기척이 멈추었다.
“뭐 하긴. 그냥 있다.”
“형, 괜찮아요?”
“괜찮지, 뭐...”
말 끝이 잦아드는 것을 보니 형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인가 보았다. 하긴 그새 술도 좀 깼을 테고 덜컥 오늘 밤의 이 돌발 행동에 대한 후회도 밀려오기 시작했으리라. 나는 방문을 빼꼼 열고 밖을 보았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바 ‘피크타임’이라 다들 호객하러 나갔나 보았다. 맨발로 조심스레 형이 들어간 방문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누, 누, 누구세요?”
“형, 나에요.”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형도 나처럼 불안정하게 서 있다가 문 쪽으로 다가왔다. 어지간히 초조한 표정이었다.
“형. 갑시다. 지금 아무도 없어요. 빨리.”
“그러다가 잡히면 어쩌려고?”
“돈 냈어요? 돈 냈으면 마음이 바뀌어 안 하고 그냥 간다고 하면 될 거고, 안 냈으면 기다리기 싫어 다음에 온다고 하면 안 되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책에서 주워 익힌 대로는 도망가다 잡히면 온갖 수모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럴까...?”
“시간 없어요. 빨리 신발 신고 나와요.”
우리는 서둘러 신발을 신고 조심조심 마당으로 내려서서 잠시 기척을 살폈다. 불 켜진 방 몇 군데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교성 말고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몸을 숙이고 마치 고양이 걸음 걷듯이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대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막 철대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덜컹’ 등 뒤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하다 말고 어디 가?”
“네? 저...”
대답하려는데 “오줌 싸고 올게.” 혀 꼬부라진 소리로 어떤 아저씨가 대답했다. ‘휴우. 십년감수했네. ㅆ’ 대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골목 양 편을 살폈다. 아무도 안 보였다.
“갑시다!”
찻길로 나가는 골목길을 냅다 달렸다. 심장이 쿵쾅 쿵쾅거리는 소리가 온 골목길에 메아리칠 것 같았다. 발은 허공에 매달려있는 악몽을 꿀 때처럼 도무지 땅을 디디는 느낌이 없었다. 그저 하냥 버둥대는 내 뒷덜미를 누군가가 확 잡아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차마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마침내 골목을 빠져나온 우리 앞으로 빈 택시가 지나갔다.
“택시! 택시!”
저 앞에 서는 택시를 향해 달렸다.
“야! 서! 이 새X들아!”
고함 소리가 뒤를 따라왔다. 헐레벌떡.
“아저씨! 출발! 출발이오!"
뒤 차창으로 돌아보니 불과 몇 걸음 떨어져 흰색 쫄티들이 따라붙었다가 우리가 탄 택시를 향해 침을 뱉으며 주먹감자를 먹이고 있었다.
“휴우.”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소금기가 눈을 따갑게 하기에 이마를 훔치니 땀이 흥건했다.
“아니. 사장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기사 아저씨가 물어오셨지만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다방으로 향했다. 앞자리에 앉은 형은 하염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주방 조명만 켠 채로 캔맥주를 하나씩 앞에 두고 형과 나는 우리 다방의 1번 테이블에 앉았다. 뜬금없게도 30분쯤 전 영등포의 그 방에 걸려있던 오비맥주 달력 속의 헐벗은 여자가 떠올랐다. 젠장. 어색했고, 도망쳐 나올 때의 모습을 떠올리니 서로 창피한 느낌이었다. 형이 내게 담배를 하나 건넸다.
“치혜야. 고생했다. 미안하다.”
침묵.
“괜찮아요, 형. 덕분에 좋은 경험한 거죠, 뭐.”
침묵.
“치혜야.”
“형.”
“먼저 얘기해라.”
“아니에요. 먼저 하세요.”
침묵.
“오늘 있었던 일은 무덤까지 갖고 가는기라! 알았제?”
“형. 내가 할 소립니다. 꼭이요!”
건배를 했다.
“형. 근데요...”
“응?”
“솔직히 말해서...”
“응. 뭐?”
“형 오늘 그런데 처음 가본 거지요?”
“아이다! 내가 부산 살 때 완월동 싹 다 누비고 다녔다 아이가. 영등포가 처음이제.”
“아닌 것 같은데...”
“뭐라카노? 내가 고마 완월동서...”
“근데 형 잠바는 어딨는데요?”
“뭐? 잠바? 아! 맞다. 잠바를 놓고 왔네. 에이 씨...”
“처음 맞네, 맞아.”
우리의 한 밤의 그레이트 어드벤처와 대 탈주극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지금 나는 무덤까지 가자는 형과의 ‘금석맹약을 식’한 채 이렇게 줄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형과는 연락이 끊긴 지가 어언 30여 년 가깝다. 냉동 회사에 입사해서 잘 살고 있다는 형의 소식은 오래전에 바람결에 들은 적이 있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뿐이다.
Nazareth의 "Love Hurts"를 들었다. 오랜만에 형 생각이 났다. 그 시절 K형은 물론 우리 또래들의 애청곡이기도 했거니와 그 격정의 밤에 형이 눈물로 흥얼거렸던 곡이기도 했기 때문일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보곤 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인간이 가장 불쌍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가장 밝다고 하고, 백조는 죽기 직전에 한 번 아름답게 운다고 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빛났던 먼 우주의 별도 소멸되기 직전에 가장 크고 밝게 관측된다. 실로 명멸(明滅). 꽃은 만개한 뒤에 지고 단풍은 찬란한 후에 잎을 떨구는 법.
모든 것들이 죽기 직전까지 활발하고 그 정점이 맨 뒤에 오는데 인간은 가장 밝고, 빛나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건강한 시절이 너무도 이른 때에 너무도 짧게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이후로는 수십 년 동안의 내리막길. 소멸만을 향해 가는 붙잡을 수 없는 여정! 육체와 정신 성숙의 불일치로 인해 이루 셀 수 없는 아픔과 불행과 희비극이 교직된다.
특히나 육체는 젊음으로 불끈거리고, 경주마의 눈가리개처럼 한 방향으로만 향해있는 정열로 똘똘 뭉친 남자아이들의 어이없음과 어리석음은 농담으로 던지는 ‘똥멍청이’라는 단어도 과분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삼십여 년 전의 우스꽝스러운 기억도 - 그 당시는 절체절명으로 중요한 일이었지만 - 이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생각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어긋나는 그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그것을 꿰맞추어 보려 노력하고, 그러면서 통음하고 울고 웃고 하는 사이 인간도 차츰차츰 숨겨진 절정을 향해 익어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숙함과 어리석음과 치기들이 잘 치대어져 먼 뒷날 그 기억을 바라보는 심안과 심상이 제법 멋진 분들을 꽤 많이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투적으로 한 마디 던져보는 것이다. ‘추억은 아름답다.’
누구나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날이, 그리고 저도 모르는 새 잃어버린 날이 하루쯤 있는 법이다.
https://youtu.be/ryuCtW3RXoo?si=w4KiUoMvS-010Hr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