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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하 Feb 14. 2022

오작동하는 절망의 시동장치

‘두 번 떨어진, 죽일 수 없는, 불온한 년’에 대하여, 무니페리 개인전

무니페리 개인전: 빈랑시스檳榔西施, 2021.12.9-2022.1.8. CR Collective

전시리뷰, <오작동하는 절망의 시동장치: '두 번 떨어진, 죽일 수 없는, 불온한 년'에 대하여>


1.

2000년대 K-드라마 서사에서 여성이 ‘잡초 같은’, ‘불지옥에나 떨어져야 할 년’으로 호명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그녀들이 지은 ‘죄’, ‘더러움’을 씻는 것은 불가능하며, 강인한 생명력과 번식력으로 인해 불에 타 죽여야 한다고 주장된다. 동시에, 그녀들은 그들에게 닥칠 혹은 이미 닥친 복수의 불행, 그로 인한 극심한 고통, “[그녀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송두리째 빼앗고,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기력마저도, 살고 싶은 의욕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의사소통 불능의 고통”[1]에도 개의치 않고 ‘씩씩하게’ ‘생기를 유지하며' 이를 견뎌내는 여성이다. 그녀들의 생기와 활력은 무참히 밟힌 잡초가 강해지는 것처럼,  불행의 연속에서 한층 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2]

 

그녀들의 “절망의 시동장치"는 오작동하고, “검은 태양”을 향해 폭주한다.


복수(複數)의 ‘잡초 같은’ 여성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무성 생식하며 폭발적으로 번식한다. 그들은 ‘제자리’가 없다. 태초에 호명되는 순간, 성장할 토지를 약취당했다. 대신 그들은 주 재배되는 농작물 사이를 누비고 토지를 쟁취하며, 자신들의 형이상학적인 명철성을 스스로 획득한다. 때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들의 무의미해 보이는 번식과 폭주는 사회에서 외면받거나 혼란을 자초하고 타인을 혼란에 빠뜨리지만, 다수의 서사에서 그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그 ‘잡초 같은’ 여성 프로타고니스트들에 대한 나의 환멸은 우연적인 사건과 그들의 행복에서 연유하며, 그들을 ‘잡초’로 투영하는 자—주로 남성—의 증오는 지배할 수 없다는 공포심,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유예일 뿐이다. 메아리치는 과거의 외상들에 갇혀 체념하지 못한 채, 그 프로타고니스트들의 ‘활력’을 관조하는 일은 무성생식된 복수 자매의 일원으로서 서로를 상실할 수 없다는 슬픔, 혹은 남성으로서 지배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증폭시킨다. 검은 태양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매는 “상실의 보완물”로써 또 다른 자매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3]


지금 이 환멸, 일련의 끔찍한 사건들, 별안간 삶에 등장하는 배반, 심신장애, 혹은 유령처럼 묶인 존재들은 우리의 일상적 불행의 목록 중 일부일 뿐이다.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네 귀퉁이가 눈에 띄는 불행의 목록은 삶의 부조리와 그녀들의 강인함, 생명력, 저항 사이를 진동한다. 씨알 콜렉티브(CR Collective)에서 2021년 12월 9일부터 2022년 1월 8일까지 진행되는 무니페리(Mooni Perry)의 개인전 《빈랑시스檳榔西施》는 그 진동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시차(parallex)에서 발생하는 공백, 맹점을 비극, 부조리로 투영하는 논리, 즉, 이분법적 논리(남성과 여성, 빛과 어둠, 개방과 폐쇄 등) 사이의 대극적 대립을 무성생식된 자매들 사이의 극소의 간극으로 치환한다. 검은 태양으로 내달리지 못하는 복수(複數)의 자매들과 손잡고, 맹점에서 벗어나, 포털로 뛰어듦(jumping, falling)으로써 “복수(復讐)로서의 죽음 혹은 해방으로서의 죽음”[4]을 실현한다.



전시 전경, Courtesy of the artist and CR Collective


2. 

《빈랑시스檳榔西施》전시의 주요 작품은 동명의 작품인 <빈랑시스檳榔西施>(2021)이다. 전시장 정면에 설치된 3 채널의 영상, 우퍼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저음과 사운드는 전시 공간을 가득 메운다. 이 작품은 같은 해 베를린의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그룹전 《BPA// Exhibition》에서 8월 19일부터 9월 2일까지 챕터 1을 초연했고 총 세 개의 챕터는 본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다. 챕터 1은 판소리, 챕터 2는 실재/가상 인물의 인터뷰, 마지막으로 챕터 3은 리서치 프레젠테이션 형식이다.


챕터 1에서는 젠더리스(gender-less)한 의상을 갖춘 소리꾼이 등장한다. 소리꾼은 고수(북 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두 번 떨어진, 죽일 수 없는, 불온한 년”의 서사를 몸짓과 발림을 섞어가면서 구연(口演)한다. 이 서사는 판소리의 일반적인 서사의 구조가 그러하듯이, “부분적 독자성”을 지니며, 사건의 전개와는 무관한 일화들로 구성된다. [5] “유리창을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지닌 늙은 여자”의 욕지거리에 “쓰레기가 뭐 어때서요?”라고 되묻는 여성. 고구마, 옥수수, 수세미, 조랑박, 오이 그리고 작은 페니스로의 의태적 귀결. 독 안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결심하는 이 등. 이어서 판소리 장면이 페이드아웃(fade-out)되며, 전시의 핵심이 되는 단어와 문장—점프, 반복, 포털, 깨끗함, 눈을 씻고 봐도, 죄인이 없으니, 나라도 표적이 되어야겠다—이 거리의 풍경에 중첩되며 등장한다.


이러한 분열적이고, 편집적인 방법론은 맞은편 타인에 의해서 읊어지는 <빈랑시스 챕터 3 스케치>에 등장하는 리서치 방법론과 일치한다. 한 방향으로 발전하여 기-승-전-결을 맞는 방법이 아닌, 각각의 이론과 리서치가 다방향적(multi-directional)으로 간섭하며 연쇄의 고리를 만든다. 무니페리는 이를 “이론적 간섭의 연쇄”라 말한다. 간섭의 연쇄는 서사의 방식뿐만 아니라, 챕터 1, 2에서 등장하는 카메라-영상 기법과 비디오 채널과 국문 자막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4k, 8mm, 16mm, VHS(Video Home System) 영상이 세 개의 채널을 통해서 무작위로 송출된다. 국문 자막은 좌우 영상에 두 개로 분할되어 등장한다. 이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말하는 시차에 의한 시간적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일 수도, 촬영자의 존재적 시간성에 위치한 다름 혹은 창가의 파란 포털 앞에서 전시를 관람하는 이의 시차에 의해 발생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챕터 2는 빈랑(檳榔, Betel nut)과 빈랑시스(檳榔西施, Betel nut Beauty)에 대해 말한다. 빈랑은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열매를 지칭하며, 카페인과 같은 각성효과와 환각효과로 장시간 운전하는 트럭 기사들에게 소비되어 왔다. 빈랑 판매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그 양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는데, 빈랑 패키지 디자인과 빈랑을 판매하는 여성인 빈랑시스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들은 주로 신체를 노출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자세로 소비자들을 모객 한다. 챕터 2에서는 빈랑 농업에 종사하는 이의 인터뷰에서는 빈랑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구강암을 발생시키는 열매로써 홍보되는 정부 차원의 시선, 두 번째는 대만의 성 산업과 연관되는 소비자들의 시선이다. 인터뷰는 다소 객관적인 시선으로 진행된다. Baby라는 빈랑샵을 운영하는 빈랑시스인 Uki와 Luu Qoo의 인터뷰는 후자의 시선에 의문을 던진다. 빈랑 문화를 젊은 세대에게 소개하고, 서브컬처로서의 편입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빈랑시스인 가상인물 백사와 청사[6]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인터뷰에서 Uki와 Luu Qoo가 “우리는 깨끗하고 용감하게 살 거야.”라고 선언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용기를 가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죽일 수 없다. 다시 말해, 두 번 떨어진 이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죽일 수 없다. 주권의 성립은 죽음의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 죽음을 향한 두려움은 죽음을 피하려는 이들을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다. 반면, 죽이는 것은 피주권자의 존재를 소멸시키기 때문에, 주권을 성립의 전제조건을 파괴한다. [7] “우리는 깨끗하고 용감하게 살 거야.”라고 선언하는 백사와 청사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주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니페리의 <빈랑시스>에 등장하는 ‘두 번 떨어진 불온한 년’은 죽일 수 없으며, ‘두 번 떨어진 불온한 년’으로 대표되는 빈랑시스들인 백사와 청사는 영겁을 회귀한다.


이러한 논리는 챕터 1에서 판소리 소리꾼이 “눈을 씻고 봐도 죄인이 없으니 나라도 (표적이) 되어야겠네”라고 읊는 장면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죄’를 지은이는 없지만, 스스로 ‘죄인’이 됨으로써, 죽음으로 향한다. 죽임을 당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죽음을 향하는 존재는 통제자(주권자)로 하여금 통제권(주권)을 상실하게 한다. 자신의 생명력, 피주권을 타인에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함으로써, 검은 태양을 직시함으로써,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지배-피지배 관계 성립 조건을 와해시킨다.


맞은편에 자리한 챕터 3에서 이러한 논의의 깊이를 한층 더 한다. “구성된 불안의 경우 대상은 환상의 제한 속에 있는 반면 주체가 ‘환상을 횡단’하고 환상적 대상에 의해 채워진 공백, 간극을 대면할 때 우리는 구성하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라는 지젝의 저서를 인용하며, 그녀는 “빈랑시스, 더러움이라는 개념을 와해시켜 버리는, 당황시키는”이라는 코멘트를 했다. [8] 즉, 빈랑시스는 주권자/피주권자, 지배/피지배자라는 양 스펙트럼의 간극에 위치함으로써, 그 개념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사이의 존재로 점핑(jumping) 혹은 떨어지는 것(falling)은 복수로서의 죽음 혹은 해방으로서의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것이다. 그들은 사이로 존재함으로써, 죽음을 향한다. 그들은 죽지 않는다. 다만, 두 시야 사이의 맹점에 위치함으로써 죽음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면에서 검은 태양을 (아직) 직시하지 못하는 이에게 Uki와 Luu Qoo 혹은 백사, 청사의 포털로의 뛰어듦은 “쓰레기가 뭐 어때서?”라고 질문하는 용기를 쥐여준다.


3.

무니페리는 전시 전반에서 메리 더그라스(Mary Douglas)의 『순수와 위험(Purity and Danger)』을 경유하여, 오염의 알레고리를 ‘장소’와 연결 짓는다. [9] 메리 더글라스는 제자리에서 벗어난 존재를 더러운 것이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신발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이 아니지만, 식탁 위에 올려 놓였기 때문에 더럽다. 음식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이 아니라 침실에 식사 용기를 놓는 것이 더럽거나 옷 위에 흘린 음식이 더럽다고 여긴다. [10] 즉, ‘제자리’에서 한 번 떨어진 (거세된) 여성과 그리고 두 번 떨어진 섹슈얼리티를 파는 여성, 즉 두 번 떨어진 타락한 여성은 더럽다고 여겨진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더글라스의 명제를 김현경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명제는 “모든 존재가 우주적 질서 안에서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11]라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고, 여성을 집 안으로 퇴거시킴으로써,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위치시킨다. 즉, 라깡의 시차적 관점(Parallex view)에서 맹점에 위치시킨다.


메리 더글라스는 미분류되고 미분화된 사이 존재들, 애매모호한 것을 직면하는 것을 윌리엄 엠슨(William Empson)이나 에렌즈바이크(A. Ehrenzweig)를 언급하며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명확한 구조를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가 즐기는 것”이며, “미적 쾌락은 분절화되지 않는 형식을 지각하는 데서 생겨난다”라고 말한다. [12] ‘제자리’에서 벗어난 ‘사람도 뱀’도 아닌 존재가 시공간 사이를 나들고, 빈랑시스의 Baby와 같이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13]은 성노동 산업에서 주로 피해자로 그려지는 여성을 주인으로 위치시킨다. 이분화된 양극단의 존재가 아닌, 미분화된 사이-존재들을 맹점에서 이끌어내고, 그 구조를 해체시킨다. 이로써, 전시 전반에 얽혀 있는 남성/여성, 밖/안, 깨끗함/더러움이라는 양극단의 스펙트럼을 구기고, 불태움으로써 하나 안의 사이 존재들로 해방시키는 미학적 쾌락을 제공한다.


이처럼, 무니페리의 시도는 다방향적으로 간섭하며 연쇄의 고리를 만드는 이론적 간섭의 연쇄와 그 의미를 한층 강화시킨다. 무성생식된 자매들 사이의 극소의 간극으로 치환된 사이의 대극적 대립은 검은 태양으로 내달리지 못하는 복수(複數)의 자매들에게 절망의 시동 장치를 부수고, 파괴시킴으로써, 맹점에서 벗어나, 포털로 뛰어들게 한다. 그리고, 복수(復讐)로서의 죽음 혹은 해방으로서의 죽음의 연대를 창조한다. 이러한 연대를 통해 어쩌면 영겁의 시간 동안 불가능해 보였던 부조리 안에서 미학적 쾌락과 더불어 느려졌던 혹은 잠시 중단되었던 삶의 리듬을 회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 전경, Courtesy of the artist and CR Collective
전시 전경, Courtesy of the artist and CR Collective



[1] 줄리아 크리스테바, 『검은 태양』, 김인환 옮김, (서울: 동문사, 2004), p. 13.

[2] Ibid., p. 14.

[3] Ibid., p. 15

[4] Ibid., p. 14.

[5] 황미연, 「판소리의 구조」, 『우리의 소리 세계의 소리 판소리』, p. 32.

[6] 문현선에 따르면, “백사담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갈등-투쟁-패배 또는 승리라는 투쟁담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 시퀀스에서 ‘흰 뱀 이야기’는 백사(비인간/여성/민간인)와 허선(인간/남성/관리)이 갈등을 일으키고 투쟁하다가 최종적으로 패배하는 좌절된 투쟁담으로 읽힐 수 있다.”라고 한다. 무니페리의 빈랑시스 챕터 2 서사에서는 주로 백사-청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허선(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또한, 무니페리가 BPA Exhibition에서 언급한 청사에 대한 후기작 (혹은 리서치) 또한 기대할 만하다.  - 문현선. "홍콩영화 속의 중국 고전서사:<白蛇傳(1962)>과 <靑蛇(1993)>의 서사체 분석을 중심으로" 중국소설논총 no.26(2007) : 359-398. doi: 10.17004/jrcn.2007..26.019.

[7] Michel Fouc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5-76, ed. Mauro Bertani, Alessandro Fontana and François Ewald, trans. David Makey (New York: Picador, 2003), 95.

[8] 전시장에 비치된 무니페리의 리서치 페이퍼에서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서울:마티), 2009. 재인용

[9] Mooni Perry, "How can we fall and therefore jump?", 47:14, posted by KW Institute for Contemporary Art, 2021, https://www.kw-berlin.de/en/bpa-talks-4/ 

[10] 메리 더글라스, 『순수와 위험(Purity and Danger)』, 유제분, 이훈상 옮김, (서울:현대미학사, 1997), p. 69.

[11] 김헌경, 『사람, 장소, 환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5), p. 69.

[12] 메리 더글라스, 『순수와 위험』, pp. 71~72.

[13] 김헌경, 『사람, 장소, 환대』, p.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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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하 소속 직업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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