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한 톨의 악의도 없는 공간에서
어떤 처음은 평생을 지탱할 기둥이 된다. 처음 도어스에 가던 날을 기억한다. 어쩌면 때때로, 어쩌면 매일같이.
제주에서 1년 살이를 하던 때였다. 도어스를 알게 되고 나서는 수도 없이 드나들었지만, 갈 때마다 처음 그날을 떠올렸다. 가만히 앉아 그날을 떠올리고 있으면 하루가 아무리 번잡했어도 괜찮았다. '처음'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아득하고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라, 내가 겪은 처음들은 대부분 색이 바랜 종잇조각처럼 퍽퍽하고 얄팍해졌지만 언제 생각해도 그날은 아니었다.
여느 날처럼 시청에서 술을 먹었다. 지우와 함께였다. 그리고 우리는 또 여느 날처럼 즉흥적으로, '여기 LP바가 있대.' 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둥둥거리는 베이스 소리가 커졌다. 소리보다는 울림이라고 해야 할까. 귀가 아니라 심장으로 전해져 오는 그것 말이다. 심장을 울리던 베이스음은 점점 날카로운 기타 리프로, 순진하고도 섬세한 보컬의 음성으로, 마침내는 음악 그 자체로서의 소리로 바뀌었다. 계단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새파란 문. 문을 열자 소리는 짙어졌다. 그건 한여름에 에어컨 바람을 쐬다 밖으로 나오면 덮쳐오는 열기처럼 강렬했는데, 안타깝게도 만석이었다. DJ 준환 씨는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했고 우리는 홀린 듯 다음을 기약했다.
그날 그 문을 연 후로 도어스 생각을 자주 했다. 시청은 아주 번잡한 거리였는데, 열정도 정의도 낭만도 뭣도 없을 것 같은 그곳에서 파란 문만 열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저마다 락과 올드팝에 심취한 채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우에게 꼭 다시 가자고 몇 번이고 말하며 지냈다. 그렇게 진짜 첫날을 위한 에필로그가 저물고 있었다.
진짜 첫날이 밝았다. 지우와 나는 만석을 대비해 조금 일찍 도착해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적당히 드라이한 레드와인이었다. 홀짝대며 눈치를 보다가 노래를 신청하기도 하고, 입천장이 까끌해질 때쯤 담배를 피우고 오기도 하면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해 저문 저녁에서 새까만 밤이 되도록 내리 스피커 앞에서 음악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으니 점차 사람이 빠져갔다.
어느덧 도어스 안에는 우리와 중년 남녀, 그리고 준환 씨까지 그렇게 다섯 명이 남았다. 미정언니를 알게 된 것은 그때였다. 네 명 밖에 없는 그곳에서 우리가 노래를 신청할 때마다 연신 "신해철 누가 신청했어?", "왜 그래 누가 신청한 거야?" 따위의 말을 던지는데 어떻게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 있겠나.
미정언니는 "난 미정이야. 염미정은 아니고."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제주의 LP바들을 순회하다가 겨우 도어스를 찾았다고 했고, 우리는 신나서 대화를 이어갔다. 두서는 없었고 낭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언니는 영화를 좋아한다는 내게, 자신도 영화 일을 했었는데 넌 꼭 했으면 좋겠다고,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를 드높이며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더 신나고 더 취해갔는데, 그때 난 미정언니가 미래에서 온 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번의 만남으로 평생을 기억할 친구가 되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틈에는 꼭 오아시스가 있었다. Champagne Supernova를 신청해 들을 때에도 미정언니는 한결같이 '이거 누가 신청했어.'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전히 도어스 안에는 우리 다섯 뿐이었다.) 그러다 처음 신해철 노래로 물꼬를 튼 것이 떠올랐는지, 이젠 종이에 적지도 않고 "그대에게 틀어주세요!" 하고 외치고는, "아무도 없는데 춤 좀 춰도 되죠?" 하고 말했다. 준환 씨는 한결같이 머쓱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우리는 그대에게가 나오는 내내 춤추고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바닥을 구르며 웃다가, 노래가 끝나자 개운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어느덧 한 시. 마감 시간이었다.
인생이 영화라면, 인생을 관통하는 대사는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도어스와의 첫 기억이 있기 전까지는 그 대사가 내 입을 통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은 아니었고, 어떤 막막함에서였다. 남을 통해 내 인생을 관통하는 대사를 듣는다면, 그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누가 내 인생을 관통할 수 있을까, 말이 안 되는 일 아니겠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허, 나의 인생을 관통하는 말은 생판 남에게서 왔다. 그리고 다시, 인생이 영화라면,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나와줘야 하는 법이다.
"막곡입니다."
준환 씨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쓱하지 않은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스피커에선 Don't look back in anger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약속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이 떠나가라 그 노래를 불러댔다. 시종일관 머쓱하고 수줍은 표정을 짓던 준환 씨가 선명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을 때, 그때 알았다. 오늘의 이 말이 나의 인생을 관통할 대사가 되리라는 것을.
그날 우리가 나눈 것은 음악과 예술 아래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열렬한 소통이었다. 그리고 준환 씨의 그 대사는 우리의 모든 대화를 한데 엮어 그 순간을 마스터피스로 만들어버렸다. 그때 이후로 Don't look back in anger는 언제나 우리의 마지막 곡이다. 그런 순간을 겪었으니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정언니가 무릎을 꿇고 나를 보며 열창하던 그때 흘긋 본 준환 씨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있었다. 미소라는 단어와 너무나 어울리는, 정말이지 미소다운 미소였다.
그 처음 이후, 그 파란 문은 언제나 나의 기둥이었다. 나에게도 이렇게나 영화 같은 순간이 있다고 다독여주는 과거의 하루. 인간은 기억을 기억하며 살아가기에 진짜 기억은 언제나 왜곡되기 마련이지만, 어떤 순간이 기둥이 되면 왜곡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기억할수록 반질반질하게 인화된 필름 사진처럼 선명해진다. 뽀득뽀득 윤이 난다.
그렇게나 힘이 센 공간이라서 그날 그곳을 떠올리면 사소한 것에 매몰되던 내 뇌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작동한다. 아마 난 그 순간, 세상과 동떨어진 그곳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 같다. 사람이 아닌 것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이토록 찬란하고 소중하다. 그건 내 삶의 코어가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도어스는 내 마음속 가장 맑은 부분을 공간화한 곳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는 것도 까탈스럽던 마음도 모두 상관 없어지니 말이다. 파란 문만 열고 들어가면 펼쳐지는, 도시도 자연도 침범하지 못할 또 하나의 세계.
그날 내 일기장에는 '먼지 한 톨의 악의도 없는 공간'이라는 말이 적혀있다. 그 말은 도어스를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다. 언젠가 본 만화에서처럼, 세상이 모든 빛을 잃고 사막화가 된다고 해도 도어스만큼은 언제나 둥둥- 하고 고동 같은 베이스 소리가 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막 속 덩그러니 초록을 뿜어내는 숲처럼.
어쩌면 기억이란 건 영사되는 필름이 아니라, 세상의 풍파와는 상관없이 고고히 자리를 지키는 어떤 공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 공간 속 책장의 한 칸을 도어스로 채우겠다는 생각이다. 네가 물리적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내 기억의 공간 안에는 아주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하고 말하면서.
도어스는, 그 처음은 그렇게 영원해질 것이다. 이제 나는 어딜 가든 Don't look back in anger가 나오면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나오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 자체로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