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the way you are

운명이란 말보다 훨씬 운명다운 것은

by 문지구


이 이야기를 누군가는 안 믿을지도 모르겠다.


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녀가 어느 재즈바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왔다. 다정한 눈빛으로 편안하게.

제목에 명시해 놓았듯 ‘이 노래‘는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였고, ‘그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김윤아였다.


어릴 적 이 올드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후술 하겠지만, 그녀와 비슷한 루트였다. 이 노래엔 따뜻함과 애정만 존재해서 왠지 모르게 더 애달팠다. 그 애달픈 느낌이 또 싫지 않아 듣고 또 들었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한 번쯤 그녀가 이 노래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항상 그녀 생각을 했다.


그녀가 Summer kisses, Winter tears라는 타이틀을 두고 만든 공연을 한다고 했을 때, 그 공연이 심지어 커버곡이 대거 포함되었고 술을 마시며 볼 수 있는 공연이라고 했을 때 주저하는 마음 하나 없이 예매를 했다. 혹시나 완곡을 불러줄지도 몰라, 하면서. 공연을 혹은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 셋 리스트가 어떻게 짜여있을지를 궁금해하거나 예상하거나 염원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혹시나 염원하던 곡을 듣게 되기라도 하면 그 벅찬 행복을 오래도록 안고 살아간다. 게다가 커버곡이라면 더더욱이나 예상하기 힘든 법이라, 그날의 나는 그녀가 불러주었으면 했던 온갖 노래들을 떠올리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날의 공연장은 가운데 커다란 소파가 하나 있었고 그 뒤를 세션이 둘러싸고 있었다. 위쪽에는 네온사인으로 살롱 드 윤아라고 적혀 있었는데, 붉고 차분한 그 느낌이 영화 <라라랜드> 속 ‘라이트 하우스’ 같았다. 공연장이라면 늘 그렇듯 불이 꺼지고 나면 조금 몽롱해지는데,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왠지 불경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더 아름다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아름다웠는데, 인간은 때로 그걸 넘어서는 힘을 발휘하곤 한다는 걸 그날 알았다.


2부 공연이 시작되었다. 인터미션은 20분이었다. 서둘러 술을 사고 담배를 피우고 부산스러운 사람들 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바로 불이 꺼졌다. 그리고 바로 예열하듯 짧고 간결한 연주가 흘러나왔다. 그 후에 들려온 것은 Don’t go changing-.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 첫 소절이었다.

그녀는 다정하고 편안하게 가사 한 줄 한 줄을 불러주었고, 세션 솔로파트 때에는 무대 위를 느릿느릿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이 노래만큼은 편곡도 강하지 않았다. 혼자 노래를 들으며 늘 상상해 왔던 장면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상상해 온 일이 있는가. 너무 오랜 시간 염원해 왔던 일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닥치게 되면 그 많았던 상상의 기록은 어디 가고 생경함 만이 남는다. 정말이지 생경하고 당황스러웠다. 어떤 순간들은 순간이 아니라 오래전 본 영화의 장면처럼 몽롱하고 흐릿하게 느껴진다. 그날의 이 노래가 그랬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아득한 꿈같다. 저절로 자글자글한 필름이 돌아가듯 기억의 필터를 남기는 것이다.


나는 그날 그녀 덕분에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 지를 알게 되었다. 죽어도 잊고 싶지 않은 감각이다. 어떤 영화감독이 말했었지. 수십 년을 꿈꿔온 장면을 만들어냈을 때, 몇 개월을 준비하고 연습했음에도 그 장면에 개입될 수 있었던 건 우연 밖에 없었다고. 모든 우연은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우연히 만난 그녀의 노래, 우연히 들은 올드팝, 그리고 또 우연히 그녀가 불러준 그 노래.


노래가 끝나고 그녀는 우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음악까지 검열당하던 집에서 혼자 있던 날, 몰래 라디오를 켰을 때 흘러나온 노래였어요. 얼마나 운이 좋아요? 처음 들은 팝 음악이 빌리 조엘이라니요. (…) 그리고 이렇게 음악으로 여러분과 만나게 된 것은, 라디오를 켜고 처음 들은 노래가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일 확률만큼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그녀의 노래를 우연히 들었었다. 아주 어릴 때, 해가 저물면 딸각 거리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보던 나는 자우림의 노래를 만나게 되었다.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 일이다. 그 음악 덕에 수많은 밴드와 록 음악을, 그리고 저 먼 과거의 수많은 명곡들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녀가 몰래 라디오를 켜고 팝 음악을 처음 들은 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우스갯소리로) 표현한 것이 두고두고 남는다. 그녀처럼 나도 어떤 강을 건너게 된 셈인데 그게 그녀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우연은 어쩌면 운명보다 더 운명에 가까운 단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왔다. 운명이란 말보다 우연이란 말이 진정으로 운명다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우연히 들은 노래, 우연히 만난 사람들, 우연히 빠진 사랑. 기적이 있을까? 만약 없다고 해도 기적 같은 순간은 곳곳에 있다. 어떤 상상 속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자극이 현실과 완벽하게 일치되는 순간이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나. 그날 2부 첫곡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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