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을 이기는 사랑에 대하여
8월의 시작은 곧 폭염의 시작, 야외 활동을 자제하라는 권고 또한 시작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한여름 땡볕 아래 수많은 인파에 뒤섞여 뛰노는 것이 힘들거나 대단해 보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 여름의 한가운데 열리는 페스티벌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런 말들을 종종 듣곤 한다. 사서 고생, 그건 맞는 말이다. 올해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왜인지 소통 없는 운영과 이해할 수 없는 통제 속에서 버텨야 했고, 그로 인해 짜증 섞인 허탈함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줄을 서느라 날려 보낸 스테이지들을 생각하면 그건 정말 사서 고생이란 말이 왜 탄생했는 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첫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남았다. 땀과 먼지에 절어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뛰고, 숙소에 들어가면 빨래를 하고, 다시 걷고 뛰고 구르는 것을 반복했다. 그 덕에 '너 참 체력 좋다' 하는 말들을 듣곤 하지만 이곳에 다녀온 사람들은 안다. 이건 체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고, 판단이 아닌 감각이다. '사서 고생'인 줄 알았으나 '보장된 행복'이었다는 진실을 깨닫고 온다.
혹자는 펜타포트의 개최 시기를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도 하지만 나는 다른 의견이다. 록 페스티벌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를 하나 꼽아보자면 그건 '뜨거움'일 것이다. 순수, 자유, 평화, 사랑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감정들의 폭발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스테이지를 향해 달리는 우리의 열정에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이 뜨거운 마음과 기온이 일치하는 유일한 페스티벌, 이곳에서 우린 진짜 뜨거움이 뭔지, 뜨겁게 사랑하며 더위 따위가 아무래도 괜찮아지는 감각이 뭔지에 대해 배운다.
무언가를 즐기기엔 아주 큰 난관이라고 여겨지는 더위, 청결, 인파. 그 모든 걸 뚫고 어째서 이 72시간이 한 여름밤의 꿈으로 남았는지, 이제부터 써 내려가보려 한다. 뜨거운 여름, 그 뜨거움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았던 우리의 3일을 기록하기 위해.
많은 페스티벌을 다녔지만 펜타포트만큼은 부담을 느꼈다. 더위는 물론이거니와 딱히 휴가랄 게 없는 프리랜서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정이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지만 바로 작년에 펜타포트 티켓을 구하려다 사기를 당한 전적이 있기에, 이쯤 되면 인연이 아닌가 싶었는데, 올해는 시간도 티켓도 모두 구해두었다. 함께 가는 나의 동생 지우는 퇴사를 했다. 정말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 함께 더위를 대비하기 위한 물품을 사면서 또 한 번 설레고, 전날 새벽까지 일을 하고 나서 가방 한가득 짐을 챙기며 다시 설레고. 가장 대표적이고 큰 록 페스티벌인데 개최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간다는 사실에도 설렜다. 눈부신 햇빛과 더위가 기대될 만큼.
셔틀버스에 타고나면 좀 잘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인천에 들어서고 나서부터 마음이 들떴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촐랑대며 내리고 그 무거운 짐을 가뿐히 들고 입장줄을 찾아갔다. 끝점을 찾아가는 데도 꽤 오래 걸릴 만큼 많은 인파를 보며 잠시 심각해졌지만 '들어가면 뛴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다. 이미 온몸은 땀에 절어 있었고, 배낭을 멘 어깨는 축축 처져갔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총 네 시간을 버텨 입장한 우리는 곧바로 맥주부터 마셨다. 벌컥벌컥,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맥주는 먹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들어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눈동자가 초롱이 빛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다음에도 현장판매를 한다는 티셔츠를 사기 위해 또 한 번 억겁의 시간을 견뎌야 했으나, 아무렴 어떤가. 우리의 첫 펜타포트는 시작되었는데.
그렇게 금요일의 절반을 날리고 터벅터벅 장기하 스테이지를 향해 걸었다. 아무래도 괜찮다는 감각은 이때부터였나. 스테이지를 향해 걷는 동안 흘러나오는 첫 곡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빨라지는 발걸음만큼 빠르게, 그 더위와 짜증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씻겨 내려갔다. 뛰면서 흘린 땀에는 그간 겪은 짜증과 무력감 혹은 일상에서의 피로까지 섞여있었나 보다. 그렇게 스테이지 밑을 누비며 펜타포트와 함께하는 첫 번째 노을이 하늘을 감쌌다.
해가 저물고 지우와 술을 사들고 노래 부르며 크라잉넛 스테이지를 향해 걸을 때,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에 벅차오른 마음이 드럼 소리처럼 둥둥거렸다. 한여름 록 페스티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물대포도 잔뜩 맞아가며 땀과 물에 뒤섞인 사람들과 부딪히고 뛰었다. 퇴사를 하고 이곳에 온 내 동생은, 뜨거운 안녕과 다음에 잘하자와 좋지 아니한가 아래에서 작별을 하고, 오늘 우리 지금 여기 다 죽자는 그 노래와 함께 첫 펜타포트를 시작했다.
록 페스티벌의 장점 중 하나는, 싫든 좋든 관객들이 모두 같은 감정을 느낀 채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린 밤이 깊었네를 끝없이 부르며 헤드라이너 스테이지를 향해 걸었다. 완전한 밤이 되면 사람들은 점점 광기에 사로잡힌다. 선선함이나 살랑임 따위는 없다. 오로지 이 열기 속에서 음악 아래 뛰고 구를 뿐이다. 그렇게 헤드 스테이지로 들어서면 더위와 술에 취한 사람들과 함께 뒤섞여 우후죽순 생기는 슬램핏 사이를 누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심전력을 다 할 수 있다.
금요일 헤드라이너였던 아지캉(Asian Kung-Fu Generation)의 Rewrite를 다 함께 목놓아 부르며, 나의 첫 펜타포트는 그날그날의 노래 가사로 기억하겠노라고 다짐했다.
意味のない想像も 君を成す原動力全身全霊をくれよ
의미 없는 상상이라도 너를 이루는 원동력 전심전력을 다해줘
다큐 3일 펜타포트 편에서 '세상과 단절된 4차원의 세계 같다'는 표현을 기억한다. 세상 따위가 감히 건들 수 없는 것들이 여기에는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온 마음과 온 힘을 다 하는 우리가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후술 하겠지만, 21년 만에 이 무대에 처음 선다는,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이 걸렸다는, 십수 년 혹은 처음으로 한국에서 노래한다는, 여기에 올라오는 게 꿈이었다는 그 모든 밴드는 불사르듯 무대 위를 누비며 광기와 환희에 찬 눈으로 관객을 본다.
우리는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해받고 (어쩌면 그들보다 더) 전심전력을 다해 뛰고 소리치고 부딪히며 세상과 단절된 이곳을 삼킨다. 전심전력으로, 뼈와 살이 될 정도로.
3일간 펼쳐질 그 4차원의 세계에 진정으로 입성한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 거라는 다짐과 함께, 금요일이 저물었다. 남은 이틀, 전심전력을 다해보자, 모든 걸 불태우고 재만 남긴 채 돌아가자, 는 마음을 안은 채 깊은 잠에 들었다.
토요일이다. 벼르고 벼르던 그날이다. 우린 입장과 동시에 낮 공연 스테이지로 뛰어갔다. 보통 낮 공연은 익숙지 않은 밴드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에겐 그런 것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낮에 하는 공연을 볼 수 있고, 대낮의 잔디밭을 누빌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이미 흥분한 상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총 아홉 개의 스테이지를 뛰었다. 토요일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말 그대로 땡볕이어서, 땀을 닦는 게 아니라 털어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무렴 어떤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어도 무대 위에선 쉴 새 없이 연주와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말이다. 그저 맥주 한 잔, 소방차가 뿌려주는 물줄기만 있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끼리의 이야기지만, 이날 낮에는 펜타포트 3일을 요약할 수 있을 무대가 하나 나왔다. 단편선 순간들의 '음악만세'였다. 노래를 부르기 전, 21년 만에 이 무대에 처음 선다는 그 말이 끝나고 우린 각각 음악과 만세를 외쳤다. 사람들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선 슬램을, 어딘가에선 서클을, 어딘가에선 비명을 질렀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음악을 낱낱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무대 위 단편선 순간들도 마찬가지였다. 깃발을 들고 무대 위를 질주하고, 소리를 지르고, 기타로 슬램 하듯 몸을 부딪히는 등 본 적 없는 퍼포먼스들이 나왔다. 아니,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아주 즉흥적인 행위 예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오직 그 순간 그 자리에서만 나올 수 있는 몸짓과 표정으로, 감히 가늠도 안 되는 벅찬 눈빛으로.
그 장면은 이상하게, 내가 꿈꿔온 순간처럼 느껴졌다. 예상할 수도 없고 꿈꿔본 적도 없지만, 오랜 시간 꿈꿔온 것처럼, 아주 간절하게 바랬던 것처럼 그 순간이 벅차고 소중했다. 이 순간에 내가 존재할 수 있음이 자랑스러울 정도로.
또 어쩔 수 없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공연은 aaa였다. 서브헤드의 특권, 노을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록 페스티벌의 특징 중 하나는, 날씨와 기온 그리고 관객의 표정처럼 공연 외 부수적인 것들이 기억에 아주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공연을 완성시키는 요소라는 진실 또한 느끼고 온다.
AAA공연의 막바지에 혁오의 TOM BOY가 울려 퍼졌다. 그날 그 시간의 노을은 하늘이 온통 분홍색이었다. 광활한 하늘이 비현실적인 색으로 물들고, 모든 관객이 조명을 받은 것처럼 선연했다. 모두가 함께 부르는 가사는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청춘의 표상 같은 말들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사람들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이테가 잘 보이지 않는, 젊은 우리들 중 하나였다.
그 아름다운 노을을 지나, 깜깜한 밤의 메탈이 시작되었다. 헤비메탈이 뭔지 확실히 보여주자던 메써드는 그날의 우리에게 메탈의 애티튜드를 심어주었다. 모든 것을 함께 만들어가는, (조금 과격해 보일 순 있겠지만) 평화와 사랑이 선행하는 그 태도 말이다. 한밤의 메탈은 누가 뭐래도 광기의 슬램이 따라야 하는 법.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그로울링 아래 우리는 누구보다 세게 부딪히고 일으키고 털어주며 그 밤을 시작했다.
모든 힘을 소진했다고 느꼈다. 슬램도 헤드뱅잉도 전심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지우와 나는 낡은 종잇장 같은 걸음을 한 채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펄프의 무대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그 순간, DISCO 2000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우와 나는 동시에 장초를 떨구고 스테이지를 향해 달렸다.
사실 우리의 첫 펜타 입성기를 단 한 장면으로 설명하자면 이 순간일 것이다. 온 마음과 온 힘을 쏟아붓고 나서도 곡 하나에 전력 질주를 하게 만드는 여름밤. 그게 우리의 첫 펜타포트였다. "멈추지 마, 뛰어!" 하고 외치며 스테이지 앞에 도착했다. 지우는 도착 하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춤추고, 나는 '진짜 펄프다'하며 울부짖었다.
세상과 단절된 여기서의 시간은 현실과는 다르게 흐른다. 펄프의 90분은 아주 짧았다. 더불어, 우리가 보낸 이틀도 너무나 빠르게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조금 헛헛해졌다. 눈 깜빡하면 흘러가버리는 이 유토피아에서의 시간은 그래서 귀하다. 그리하여 이틀차를 기억할 노래가사는 YOUNG MAN으로 정했다.
Every day is yesterday We don't look back Meaning's always meaningless, we, the young Forever mercy
매일은 과거가 되고 우린 뒤돌아 보지 않아 의미는 언제나 의미 없는 것, 우리는 젊으니까 영원한 은총을
여기서만큼은 기쁨이 떼로 오고 슬픔은 스쳐간다. 음악을 제외하면 모두가 고생스럽고 짜증스러웠어야 마땅하지만, 우린 이곳의 진실 하나를 이미 알고 온다. 삶의 비정한 진리가 여기에서만큼은 거꾸로 흐른다는 것을.
떼로 오는 슬픔과 스쳐가는 기쁨을 느끼며 살던 우리는 3일간 떼로 오는 기쁨을 온몸으로 느끼며 짧은 분노 따위는 흘려보낸다. 아무래도 괜찮은 것이다. 스쳐가지 않는 기쁨이 뭔지 알기 때문에.
그리고 기나긴 인생에서 짧은 기쁨으로 남을 이 3일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그 기억은 내가 죽어야 끝난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갈 기억을 나는, 우리 모두는 가득 안은 채 돌아온다.
이젠 정말 마지막 날이다. 아침부터 우리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날 저녁, 헤드라이너의 공연이 끝나면 셔틀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행군하듯 부지 안으로 입장하며 결의를 다졌다. 마지막까지 이곳을 꼭꼭 삼켜 내 몸으로 만들겠노라고.
일요일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아티스트, 자우림의 스테이지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김민규의 무대가 끝나기 한참 전에 메인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고대하던 펜타포트의 자우림을 본다는 사실이 벅찼다. 스테이지가 시작되고, 자우림은 그간 공연에서 자주 부르지 않던 (소위 말해) 레어 곡들을 연이어 불렀다.
이날의 날씨는 아주 흐렸다. 낮에 투셰 아모레의 공연부터 띄엄띄엄 비가 내렸는데, 신기하게도 자우림의 스테이지 때에는 하늘이 흐리기만 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살짝 주황빛 노을을 보여주었다. 3일 내내 아름다운 노을 아래 젊음을 응원받으며 보냈다.
자우림의 스테이지가 끝나자 밤이 되었고, 9년 만에 돌아온 3호선 버터플라이를 향해 걸었다. 9년이라니. 학창 시절에 MP3로 3호선 버터플라이의 <스물아홉 문득>을 들으며 스물아홉 살이 되면 꼭 듣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들은 사라졌다. 그간 나는 그들의 노래를 조금 잊고 지냈다. 그리고 올해, 나는 스물아홉이 되었다.
그래서 1월은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래를 다시 듣기 시작했다. 들을 때마다 멍하니 교실 안에 앉아 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펜타포트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어쩌면 오아시스의 재결합보다도 더 기뻐했던 것 같다.
지우와 하이볼을 사서 스테이지로 가는 길, 그들은 스물아홉 문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스물아홉이 되어, 그 나이가 되면 꼭 듣겠노라 다짐한 노래를 (심지어) 본인들이 라이브로 부르고 있는데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꿈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모든 상황에 1 퍼센트의 현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후 불어오는 바람과 시작되는 전설 같은 노래들,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함께 뛰놀던 모든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스물아홉을 지나고 있는 나마저도.
여운을 좀 가라앉혀야 했다. 지우와 천천히 담배를 피우고 메인 스테이지로 향했다. 그때부턴 비가 조금씩 거세지더니, 장대비로 바뀌었다.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세찬 비가 마구 내려대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은 더 미쳐갔다. 마치 자기 자신을 버린 것처럼.
펜타포트 3일을 회상하며 우리는 벡의 무대를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한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미쳐버린 사람들 속에서 보낸 80분은 너무도 자유로웠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함께 했으며, 모두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안도감이 우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공연은 이래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공연의 완성도는 그날의 관객이 결정한다는 진실을 느끼고 올 수 있기에. 벡의 공연은 그의 라이브와 더불어 내리는 장대비와, 그 장대비를 맞으며 세상과 단절된 이 유토피아에서의 모든 행복을 흡수하며 날뛰는 사람들이 완성했다. 다 함께 세상이 끝날 것처럼 빗속을 질주하며.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태운 우리는 첫날의 다짐을 완벽히 수행했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정말 재만 남은 느낌이었다. 비에 쫄딱 젖은 우리는 집에 가는 버스에 탈 때까지 이 순간을 회고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일요일을 설명할 가사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우림의 노래가사로 정했다.
용감하게 씩씩하게 오늘의 당신을 버려봐요.
나 자신을 '진정으로' 버려본 적이 있는가. 버리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는 나와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생긴다. 그렇게 우리는 씩씩하게 우리를 버린 채 뒤섞인다.
어딘가에 묶여있었을 우리는 마음껏 해방되고 사랑하며 아주 순수하고 맑은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버림으로써 진짜 나를 찾는 아름다운 아이러니를 가슴에 새긴 채 돌아온다. 원래 모든 진리에는 아이러니가 함께하는 법.
첫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그 3일은 우리에게 전심전력에 대해, 뒤돌아보지 않는 마음에 대해, 나를 찾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우린 그걸 몸으로 배웠다. 정말 남김없이 꼭 꼭 삼켜 몸의 일부로 만들었다.
일상으로 돌아갈 우리는 그렇게 3일간 축적된 용감함과 씩씩함을 안고 다시 일어나 걷는다. 또 한 번 오늘의 나를, 오늘의 당신을, 오늘의 우리를 버릴 그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