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3일 뒤에 엄마가 죽어, 그런데 넌 일생일대의 기회를 앞두고 있어. 엄마 곁에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는 거야. 어떻게 할래?”
나는 엄마가 어차피 죽는 거라면 나의 기회라도 살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이없게도 그 말이 뱉어지지를 않았다. 그냥 대답 자체를 못 한 거다. 대체 그게 뭐라고.
난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며 내가 내린 결정은, 엄마의 결정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거였다.
1996년 어느 날, 나와 동갑내기 m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첫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들어간 그녀는 대뜸 음악이 좋다고 공연 제작사를 기웃거리던 차였는데 말이다. 후에 들은 거지만 꽤나 이름난 가수들과 함께 일하며 즐거웠다고 했다. 그런 그녀는 임신이 뭐라고 또 한 번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이란 선택지를 고른다. 그녀의 다섯 여동생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모두가 반대했던 결혼이라고 했다. 그렇게 가난한 딸부잣집의 장녀와 불행한 집안에서 장남 취급을 받는 한심한 남자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녀는 자신만큼 젊은 여자를 주물럭거리기에 여념이 없는 남편을 뒤로하고 아이를 낳는다.
큰 소리를 떵떵 쳐대는 남편은 돈이 없지만 안타깝게도 m은 그를 목숨보다 더 아낀다. 집안에 두 살이 채 안 된 딸과 자신뿐이어도 생태찌개를 먹고 싶다는 남편의 말 한 마디면 찢어진 슬리퍼를 질질 끌고 그 비싼 생태를 사러 시장에 간다. m은 그런 삶을 살았다. 생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도 행복을 느끼는 삶. 그런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삶에는 행복의 과정에 어떤 역할을 해줄 수단이 필요한 법이다. m에게 그건 딸이었다. 어린 딸을 어른 취급하며 자신의 고된 부담감을 덜어내고 나면 그녀는 맘 편히 행복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나의 유년기는 돈 걱정과 손찌검이 늘 붙어 다녔고 자연스레 그것들과 함께 청소년기와 성년을 맞이했다. 돈 걱정도 손찌검도 모두 그녀와 그녀 남편의 합작이었다. 그들을 미워하기만 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신발장엔 슬리퍼가, 냉장고엔 생태와 같은 식재료들이 말똥말똥 얄미운 눈을 부라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불쌍하고 가끔 귀엽고 자주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언제나 쉬운 존재였는데 그게 참 불만스러웠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생각해 줄 수 없는 거야?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자랐다. 내가 그녀보다 키가 커졌을 때, 나는 또 한 번 무너져야 했다. 그녀 남편에게 흠씬 맞고 도망치려 했을 때였다. 그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에게 발길질을 해댔는데 그때 난 모멸감이란 감정이 뭔지에 대해 한동안 생각해야 했다. 생각을 회피하는 법을 몰랐다. 머릿속을 온통 굴러다니는 바윗덩이 같은 그 생각을 무시하지 못하고 밟혀야 했다. 그때 그녀가 나에게 해준 말은, “난 너보다 네 아빠가 훨씬 중요해. 그냥 싹싹 빌어.”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 알게 된 후로는 그녀를 싫어한 지 꽤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 떠나고 싶을 때마다 생태를 사던 m이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본 적 없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슬리퍼는 가련해지고 얄미운 생태는 점점 그 몸집을 키워갔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가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린다. 내 옆에서 점점 커지는 생태, 그러다 나를 내려다보는 생태, 그런 생태를 바라보다 결국엔 눈을 내리깔게 되는 나. 그런 이미지.
기세등등한 생태 옆에는 키도 얼굴도 작은 m이 있다. 그 꼴을 보고 있으면 공연히 죄책감이 든다. -죄책감이라고 명명하긴 싫다.- 게다가 슬리퍼와 생태는 내가 커오면서 목격한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의 원형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화되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m은 그 말도 안 되는 전제와 질문을 실제로 맞닥뜨린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때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다르게 흘러갈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슬리퍼와 생태로 시작해 수많은 이미지를 양산해갈 거라는 것을 모르고. 그걸 생각하면 마음에서 질문 하나가 탁 하고 걸린다. 근데 말이야, 정말 몰랐을 것 같아?
m에게 맞았던 뺨보다 그 사실이 더 아릴 때가 있다. 그래서 그녀가 내게 슬리퍼와 생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더 커지지도, 더 낮아지지도 않는 마음으로 그녀를 대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 나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m에겐 이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