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의 흑백 영상을 찾아보는 재미에 푹 빠진 적이 있다. 태어나기 전의 시대를 훔쳐보는 것 같아 시간 여행이라도 한 듯 짜릿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초근접 기자회견, 1964년 첫 미국 방문을 시작하는 뉴욕 JFK 공항, 작은 무대 위 공연을 담은 BBC 영상까지. 모두 내 눈을 반짝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중 나는 폴 매카트니가 부르는 미쉘(Michelle) 영상을 특히 좋아했다.
유학생으로 런던에 살게 되었을 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런던을 벗어나 다른 도시를 여행하리라, 마음먹었다. 일명 ‘런던 벗어나기 월간 프로젝트(Monthly out of London Project).’ 한국에 돌아갔을 때 여행으로는 가기 어려울 것 같은 도시로 여행지를 정했다. 리버풀, 비틀즈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리버풀에 가기로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지금 하라면 절대 고사할 하루짜리 강행군 여행이었다. 기차표만 끊고 출발했던 터라 백지와 같은 하루를 앞두고 있었다. 검색 몇 번에 비틀즈 투어를 찾았다. 알차게 시간을 보내기에, 그리고 비틀즈를 좋아하는 여행객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리버풀에 도착하자마자 투어가 시작된다는 앨버트 독으로 향했다.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는 옆자리가 빈다는 것. 버스에 먼저 올라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여자분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멕시코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는 조지 해리슨 팬이라고 했다. 나는 화답이라도 하듯 폴 매카트니 팬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인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작은 골목길, 페니 레인에 도착했다. 비틀즈 곡 ‘페니 레인’ 가사에 등장하는 미용실을 지나가며 10대의 존 레논, 폴 메카트니가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상상을 했다. 존 레논이 어렸을 때 친구들과 가든파티 공연을 한 곳, 스트로베리 필드도 빠질 수 없는 장소다. 빨간색 철문이 굳게 닫힌 공터를 보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말 그대로 한 장소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속성반 투어였다. 베테랑 투어 가이드 덕분에 빡빡한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사 중인 폴 메카트니 생가를 지나 비틀즈가 292번 공연했다는 케번 클럽에 도착해서야 투어가 끝났다.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과거를 하나, 하나 꺼내 본 것만 같았다. 폴 매카트니의 내한 공연을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은 없지만 여기에는 있는, 과거의 인물을 만났달까. 비틀즈 ‘성지순례’로 기억에 남을 리버풀.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흔적을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