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혜숙 Apr 30. 2022

무협지에서 명상록까지

영어 수업하다가 책으로 큰 아이

나 : 도훈아, 너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니?

도훈 : 아 그... 무우... 협지라고 아세요?

나 : 음... 도훈아 무협지도 좋은데, 저기 위쪽(서울) 친구들도 무협지를 읽고 있을까?

도훈 : 아 그 공부 잘하는 공부짱들은 그렇지는 않겠죠?

나 : 도훈이도 공부짱 될 수 있는데...

도훈 : 아 과연 그럴까요?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눈 후 도훈이는 집에 가서 엄마에게 신용카드를 달라고 하더니 빈 배낭을 메고 천안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열 권쯤 사 왔다. 무협지가 아닌 위쪽 친구들이 읽을 만한 책과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철학, 문학, 심리학 등 인문학 도서를 사 왔다. 그 책들을 들고 수업시간에 짠하고 나타났다. 내 눈에 뜨인 책은 <미움받을 용기>와 <언어의 온도>였다.     

 

도훈 : 선생님! 제가 무협지를 모조리 치워버렸어요. 요 책들로 징검다리를 만들었죠.

나 : 징검다리? 무슨 징검다리?

도훈 : 아 제 방문에서 제 책상까지 길에 이 책들을 쫘악 깔아놨어요. 징검다리처럼 이 책을 밟고 가서 책상에 앉아요. 정말 이 책들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도훈이는 중학교 2학년이 시작될 무렵 나와 수업을 시작했다. 보통 수업을 의뢰하면 학생 어머니가 전화하시고 나를 만나기 위해 우리 집에 오시는데, 도훈이 어머니는 집 근처 카페에서 보자고 하셨다. 나가보니 도훈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계셨다. 부모님 두 분 모두가 나를 인터뷰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도훈이는 중학교 1학년까지 사교육을 받지 않고 부모님이 한글 영어 한자 독서 등을 지도하셨다고 했다. 공부를 주도하셨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영어 과외를 시작했는데 미국 교과서만으로 공부하는 것이 좀 이상해서 그만두고 선생님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가르칠 교재를 보여드리니 안심하시고 꼭 일대일 수업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다. 나중에 도훈 어머니는 나를 선택한 이유를 말씀해 주었다. 내 딸 유치원부터 고3까지 영어는 내가 직접 가르쳤다는 말에 도훈 아버지가 그 말 한마디면 믿을 만한 선생일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녀에게 공부를 직접 가르친 부모로서 뭔가 통하는 느낌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도훈이는 나와 영어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권해주는 책을 모조리 읽어냈다. 이 아이는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을 줄줄 외웠는데 내가 놀라워하면 아버지가 한글 가르칠 때 꿀밤 맞으면서 외운 거라고 했다. 문학으로 한글을 배운 아이라 그런지 독서 능력이 나날이 자라났다. 중3부터는 나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같이 읽자고 권해주기도 했고, 점점 수준이 높아지더니 여러 분야의 책을 아우르기 시작했다.

     

  21세기 출판사에서 나온 <인생 교과서>라는 시리즈가 있다. 19명의 철학자들을 각계의 대표 학자들이 풀어낸 책들이었는데, 그 첫 권인 <예수>를 가지고 오더니 나와 같이 읽고 싶다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김기석 목사님이 쓴 책이라 나도 잘 읽어봤고,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을 내게 물어오면 대답해 주었다. 며칠 후 그 시리즈의 <니체>를 같이 읽자고 해서, 책도 열심히 읽고 저자인 백승영 교수님의 동영상을 유튜브를 보고 도훈이 질문에 준비했다. 아이는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 너무 멋있다고 감탄을 했다. 21세기에 니체에 대해 책을 읽고 가슴 벅차하는 학생을 보고 나는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도훈이는 여행을 다녀오면서 나에게 펜을 하나 선물했는데 그 펜에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라고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도훈이는 나의 진정한 책벗이 되었다. 곁에 늘 두고 싶은 친구였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수능 단어장을 다 외워버리겠다고 결심하더니, 어느 날 득도한 표정으로 1800개 단어를 한꺼번에 시험을 보겠다고도 했다. 고2부터 내신 성적을 잘 받기 위해 피를 말리며 공부하는 중에는 시험 1주일 전에 한번 나에게 와서 자기가 공부한 걸 브리핑하고 갔다. 문제를 풀고 문제마다 왜 틀렸는지 왜 맞았는지 교재 여백에 메모한 것을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파이널 체크용으로 내가 준 노랑 색연필을 나에게 주면서 영작 문제 나올 만한 문장에 줄을 쳐달라고 했다. 렿게 노력해서 영어 내신 1등급이 아니라 1등을 찍는 기쁨도 누렸다.

아쉽게 2등급이 나올땐 그 슬픔도 너무 컸다.

공부하는 게 안쓰러워 내가 물었다.   

  

나 : 너의 지금 모습을 만들기 위해 너의 노력은 얼마나 들어간 거 같아?

도훈 : 0 퍼센트요.

나 : 너가 이렇게 어렵게 공부하고 있는데도?

도훈 : 이건 다 제가 좋은 부모님과 좋은 선생님 만난 덕분이죠. 저 혼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저는 너무 운이 좋은 아이에요.     


  이 아이는 ‘진짜 복을 받은 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성서에서 예수님이 팔복을 말할 때 처음 말씀하시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신께 의탁하는 겸손한 마음을 이 아이가 알고 있었던 건가.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어봐 달라고 가져왔다. 입시의 고통과 내신의 칼날로 마음에 폭풍이 칠 때, 죽음을 걸고 전쟁터에 나간 황제의 글에서 마음을 추슬렀다고 했을 때 나는 이 아이가 다 자랐구나 하고 느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