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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Mar 09. 2022

답지와의 싸움

채점 없는 공부는 없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는 엄마들이 문제집 채점을 해준다. 아이들은 문제를 풀고 엄마에게 던져 놓으면 엄마가 채점하고 틀린 문제를 같이 풀어주기도 하고 출제자의 의도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답지는 보면 안 되는 비밀문서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생이 다니는 공부방 선생님들도 대부분 답지를 압수해서 갖고 계신다. 수학 공부방의 경우 중학생의 답지도 선생님이 갖고 계신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데 나는 답지가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답지를 보고 채점을 하고 틀린 문제에 안타까워하며 답지의 설명과 자기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이 큰 공부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답지를 베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마음속에서 천사와 악마의 싸움 소리를 들으면서 공부하는 게 다 공부의 과정이 아닌가 싶다. 최근 나와 수업을 시작한 예비 중1 서진이는 지난 초등학교 6년 동안 영어 공부방을 다녔는데 공부방 선생님은 답지를 주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처음 수업을 시작하는 날 문제집 뒤쪽의 답지를 빼서 나에게 주려고 했다. 채점을 스스로 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물었다.

    

서진 : 선생님 답을 베껴 오는 학생에게 어떻게 혼내세요?

나 : 답을 베껴오는 학생은 공부할 자격이 없는 거야. 공부 그만해야지.

서진 : 저는 답지가 있으면 너무 보고 싶을 거 같아요.

나 : 그 유혹을 물리치는 게 공부의 시작이야.     


  답지를 베껴오는 학생들이 있다. 항상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번 그럴 때도 있고 어려운 부분만 베끼는 학생도 있다. 선생님들은 문제집을 풀어온 상태를 보면 금방 안다. 이게 베낀 건지 아닌지. 이상하게 아이들은 순진하게도 답안지를 베껴 놓고 다 맞았다고 한다. 양심에 찔려서 그런지 차마 맞았다고 문제 번호에 빨간펜으로 다 맞았다고 하지는 못하고 아무 표시가 없는 상태로 온다. 내가 이거 채점한 거 맞냐고 물으면 채점했더니 다 맞았다고 말한다. 확인을 하기 위해 채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독해 문제일 경우 문제의 지문이 무슨 내용이지 하고 물으면 며칠 전에 읽은 거라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한다. 문법 문제집을 베낀 경우는 그 전 시간에 아이가 어려워 했던 정도를 가늠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려워서 예제도 틀렸던 학생이 단원평가 문제를 다 맞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가 문제를 쓱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오답인 경우도 있다. 그건 전체가 객관식인 문제에서 답지의 다른 부분을 잘못 베껴서 그렇다. 답지를 잘못 베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베낀 답을 보면 긴 한숨이 나온다. 더 나쁜 것은 답지를 베낄 시간도 없는 아이다. 아예 교재를 안 가지고 온다. 학교나 독서실에 두고 왔다고 변명을 하는데 그건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다.

  답지를 베끼는 걸 알아도 나는 그냥 한두 번은 그냥 넘어간다. 심증만 있다고 아이를 몰아세우진 않는다. 특히 다른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는 경우는 아이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말없이 넘어간다.


 그런데 베끼는 행위가 멈추지 않고 계속될 때는 카톡을 보낸다. 답을 베끼지 말라고 명령하기보다는 답을 베끼고 있는 것 같은 의심이 든다고 한다. 의심으로 끝나고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혹시 요즘 숙제가 많아서 힘든지, 다른 과목 과외로 시간이 부족한지, 밤에 잠은 잘 자고 있는지, 학교 성적 때문에 고민이 있는지, 엄마와 다툼이 있었는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는지, 어디 몸이 아픈 데가 있는지, 형제자매들과 싸운 적이 있는지, 요즘 특별한 고민이 있는지 등등 수많은 질문 중 아이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힘들면 선생님과 언제든 얘기하자고 마무리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전화해서 아이의 상태를 말해주고 엄마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아이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떤 어머니들은 아이가 너무 공부를 안 해서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면 나는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묻는다. 예를 들어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하면 내가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겠다고 하고 마무리한다. 아이에게 카톡을 보내고 카톡으로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고, 어머니와 통화가 끝이냐면 아이와 잠시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아이를 잠깐 붙잡고 이야기한다. 그때 답을 베끼는 것 같은 의심에 대해 한 번 더 인지하게 해주고 어머니와 갈등이 있는지 물어봐 준다. 요즘 공부가 너무 힘드냐고 묻거나 숙제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느냐 등의 질문을 하면서 아이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다. 그러면 대부분 아이는 답을 베끼는 것을 멈춘다. 아이와 어머니와 나 3자 간의 대화로 대부분 문제는 해결된다.


  답지와의 싸움은 아이에게는 도덕적인 싸움이다. 답을 보고 베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참고 안보는 연습은 거짓말 안 하고 진실하게 공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답을 베끼는 것이 한심한 것이라고 느끼는 학생이라면 진지함으로 일단 무장이 된 셈이다. 채점은 도덕적 훈련뿐 아니라 좋은 학습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채점을 어떻게 하는지는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자기 주도 학습의 첫 단추는 채점이다. 채점은 오답과 정답을 가리는 것 이상의 과정이다.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하다 보면 틀린 문제가 나온다. 왜 틀렸는지 생각해 보고 답지의 설명과 내 생각을 비교해 보면서 개념뿐 아니라 세부사항에 집중하는 것이 공부의 기본이다. 특히 문법의 오류를 고르는 문제는 왜 문장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하나씩 따져보는 분석적 사고를 요구한다. 분석적 사고의 연습은 왜라는 질문을 계속하면서 이해가 될 때까지 논리적인 추론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틀린 답 위에 빨간색으로 정답을 쓰지 말라고 한다. 틀린 나의 답 옆에 정답을 적어 놓고 나의 오류를 잡아내고 정답이 왜 맞았는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고등학교 내신 문제의 대부분 고난도 문제는 문법 문제와 영작 문제다. 영작 문제를 풀기 위해 교과서와 시험 범위의 지문을 모조리 외울 수는 없다. 영작 문제도 결국 문법적 지식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문법 공부가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한다. 고등 내신을 잡기 위해서는 문법이 완벽해야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문법책이 문제집의 채점을 통해 오류를 분석하고 교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채점은 학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하지 않았다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된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전혀 구별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한 지식인 메타 인지는 상위권 학생이 가진 능력이라고 하는데 이 능력은 채점을 통해 길러진다고 믿는다.


  채점할 때는 나는 동그라미, 빗금, 삼각형, 별표 4가지 도형을 이용하게 한다. 동그라미는 맞은 것, 빗금은 틀린 것, 삼각형은 틀렸지만, 다시 풀어서 맞은 것, 별표는 다시 풀어도 모르겠는 것. 찍어서 맞은 것은 그냥 빗금으로 한다. 그래서 별표만 나에게 질문하고 삼각형은 질문하지 말라고 한다. 사실 이런 4가지 기호를 사용해서 채점할 줄 아는 학생은 내 학생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지키지 않는 학생도 있고 끝까지 채점하다 말기를 반복하는 학생도 있다. 확실한 것은 채점의 질이 학습의 질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채점을 잘하는 학생은 대부분 단어시험, 문법시험, 학교 내신 시험, 수능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여준다.


  그런데 간혹 이런 학생들이 있다. 답이 너무 궁금해서 문제를 몇 개 풀지 않았는데 답을 맞혀보고 싶은 유혹이 들어 답지를 보는 학생들이다. 내가 이런 유형에 해당하는 학생이었다. 서너 문제 풀고 답지를 보면 옆에 있는 답까지 보게 되어서 낭패였다. 답지는 문제를 다 풀고 봐야 한다는 규칙은 준법성을 키워줄 것도 같다.


  반대로 답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학생도 있다. 채점하는 게 너무 귀찮기도 하고 채점을 하면 너무 많은 오답이 나올 텐데 그 많은 오답을 두 눈으로 볼 용기가 없는 학생들이다. 답이 궁금하지 않다면 학습 정서는 완전히 망가진 상태다. 문제를 풀고 맞았는지 틀렸는지 궁금하지 않은 아이들은 채점을 안 해온다. 채점을 내가 해보면 틀린 문제로 문제집은 비가 마구 내린다. 채점해 왔는데 반 이상을 다 틀렸다고 채점을 해오는 아이도 자신의 점수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다. 이런 상태라면 다시 원점으로 아이의 마음을 물어봐 주어야 한다. 아이의 공부 환경이나 학습 스트레스나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나 다른 문제들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채점하고 싶지 않은 그것은 공부할 상태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채점을 잘하는 학생이 되게 하려면 선생님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공부를 하면 좋은지 왜 공부를 안 하면 나쁜지를 잘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동기부여가 되는 이야기보따리도 많이 풀 수 있어야 한다. 채점하게 한다는 것은 최고의 학습 기술로 인도하는 것이기에 채점을 안 하는 학생을 채점을 꼭 하고 싶은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과외선생님의 임무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선생님이 진정 능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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