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는 18살인데 벌써 엄마가 되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학생들이 검정고시 시험 준비를 하는 프로그램을 청소년 상담복지 센터에서 하면서 행복이를 만났다. 2014년에 처음 수업을 하고 구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 유모차에 귀여운 아기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이 아이가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나랑 같이 밥을 먹고 있던 여학생이 자기 아기라고 해서 그 때 부터 임신으로 인해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된 아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생들은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취업을 하거나 대학에 간다. 인생 초반에 불행을 겪었을지라도 검정고시라는 제도에 의해 두 번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다행한 일이다. 아이들은 취업 전에 지역의 도서관,카페, 운전면허시험장등에서 인턴과정을 갖기도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맞는 말이다.
그 과정에 내가 멘토 역할을 한다는 것 또한 교육자로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밖 친구들의 영어과목을 가르치다가 내가 캘리그라피를 할 줄 안다는 걸 아신 복지사님이 나에게 아이들과 캘리그라피 수업을 8회 정도만 해달라고 부탁해서 수업을 진행하면서 행복이의 아기 태명을 써주게 되었다. 행복이는 내가 써준 글씨를 따라 쓰면서 평소보다 백 배는 집중해서 작업하고 있었다. 달님이라는 태명을 쓰고 있는 행복이는 행복해 보였다. 캘리그라피로 아이들에게 특별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 활동을 통해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멘토로서 더 친근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캘리그라피는 또 이렇게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행복이는 캘리그라피 수업을 하고 나서 영어 수업 시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어떻게 학교를 떠나게 되었는지, 아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제 자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미술지진아에서 캘리그라퍼로
캘리그라피는 2013년에 배웠다. 도서관 독서지도 프로그램에서 만난 한 지인이 나에게 캘리그라피를 배우러 가자고 강권했다. 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 평생학습센터에서 수업을 한다고 해서 예산에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버리 한 상태에서 캘리그라피가 뭔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한 학기를 배웠지만 걸음마 수준이었다. 그후 선생님의 지도로 자격증도 따고 전시회도 두 세번 하고 나니 중급수준은 되어서 누군가를 가르칠 만하게 되었다. 미술 과목은 평생 지진아 수준이었던 내가 캘리그라퍼가 되었다는 것은 기적에 해당한다. 그 기적은 역시 교육의 효과였다.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은 교육이 아니라 무한 방목이었던 기억만 있다. 도대체 미술 실기에 대해 배운 게 없다. 선생님들은 물건들을 교탁에 놓고 따라 그리거나, 찰흙으로 이상한 얼굴을 만들거나, 수채화 도구를 들고 운동장에 나가 뭔가를 그리라고 하셨지 ‘어떻게’ 그리는지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천부적 재능이 없는 한 모든 기예는 모방에서 오는 것인데 모방할 모델이 없던 시절, 나에게 피아노든 미술이든 모든 예술은 암중모색이었다. 그때 유튜브가 있었다면!
캘리그라피 강사님은 예전의 미술 선생님과 달랐다. 붓으로 선을 긋는 것부터 여러 글씨모양을 ‘따라 하도록’ 지도해 주셨다. 나는 정말 100% 똑같이 써보려고 노력했다. 강사님은 칭찬의 달인이셨다. ‘와 정말 잘하셨어요!’ ‘정말 멋진데요’ 라고 20명의 학생들에게 연발하셨다. 강사님은 아셨던 거 같다. 초보에게는 폭포수 같은 칭찬이, 고수에게는 엄청난 지적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붓을 잡은 나에게는 끝없는 칭찬을 해주셨고 전시회 출품할 작품을 연습할 때는 글씨의 크기, 각도, 굵기, 전체 구도까지 꼼꼼히 지적해 주셨다. 전시회 작품은 100번도 더 쓴 것 같다. 화선지를 이어 붙이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지도 모르겠다. 그런 과정을 지나서 나는 미술 지진아에서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가 되었다. 캘리그라피는 나의 잠자고 있던,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몰랐을 미술 본능을 깨우고 발전시켜 주었다. 나는 캘리그라피 작품에 글씨만 쓰지 않고 그림도 좀 잘 그려보고 싶어서 수채화 수업도 받기 시작했고 그 세월도 한 3년 되어간다. 글씨에서 그림까지 배우면서 강사자질 향상을 꾀하는 중이다.
요즘은 <공부의 쓸모>, <역사의 쓸모> 이런 제목의 책들이 눈에 뜨여서 읽어 보았다. 공부를 왜 하는지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 알아야 할 맛이 나지 않는가? 나는 뼛속 깊은 실용주의자이다. 쓸모는 꼭 돈이 되거나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심미적 만족이나 정신적 위로이어도 좋다. 쓸모가 있으려면 무엇이든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뭔가를 배우면 내가 이것을 가르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면서 배운다. 주로 내 학생은 내 딸이나 내 남편이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친구들이 문제를 풀어봐 달라고 하거나 개념을 설명해 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주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것이다. 영어 수업할 때 아이들은 내가 어떻게 많은 단어와 문법을 다 암기하고 있냐고 묻는다. 답은 간단하다. 반복의 힘. 나는 반복해서 가르치니 잘 아는 것이고 뭔가를 배우고 가르치면 높은 수준의 반복이 되는 것이다. 반복해서 숙달되면 다른 이에게 그 내용을 반드시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을 돈으로 번다면 유시민 작가가 말하는 ‘지식의 소상인’이 되는 것이고 생계수단이 된다. 또 자기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인정과 존중의 느낌이다. 엔돌핀 지수가 높아진다.
위로의 글씨와 그림
캘리그라피의 쓸모는 내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라도 진도에 가면 운림산방이라는 곳이 있다. 소치 허련 선생에서 5대에 걸친 미술가 집안의 고택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고택의 우아함에 도취되어 기념관에서 본 그림과 글씨 중에 가장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도서이정 圖書怡情 이라는 글씨였다.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니 마음이 즐겁다는 말씀. 시서화 즉 시와 글씨와 그림이 함께 있는 작품을 완성해 가면서 느끼는 기쁨을 나는 아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피아노 바이엘이라도 쳐야 리스트의 최고절정의 기교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캘리그라피는 우리 옛그림처럼 시서화를 담고 있어서 글과 그림이 서로를 세워준다. 글이 주는 의미와 그림의 시각적 효과가 어우러져서 의미와 이미지라는 두 가지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사고로 남편을 잃은 60대 부인이 영어를 배우러 우리집에 오신적이 있다. 내가 액자에 넣어 놓은 캘리그라피 작품을 보고 당신에게 꼭 써달라고 하셨다. 달이 뜨면 그리운 얼굴이 뜨고 고요한 시골밤의 적적함은 낭만이 아니라 슬픔이기에 이런 분의 아픈 마음을 싸매는 데 캘리그라피가 쓸모가 있었다. 학교를 떠나야 했던 행복이에게도 남편을 하루 아침에 잃은 부인에게도, 또 글을 쓰는 나에게도 모두 위로가 되었다. 위로의 글은 다음과 같았다.